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서조 Aug 11. 2022

임선경 저 ‘백넘버’를 읽고

임선경 소설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어느 날 사람들의 수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죽음이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앞에 있는 당신의 수명이 다해간다는 것이 보인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소설이 있다. 임선경이 쓴 ‘백넘버’이다.     


‘인명은 재천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생과 사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숨을 쉬면 살아 있는 것이고, 숨이 멈추면 죽은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숫자, 사람의 등 뒤에 나타나는 초록색의 숫자가 그 사람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다. 그런데 그 숫자가 다른 사람은 볼 수 없고 화자의 눈에만 보인다. 앞에 있는 사람이 이제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죽지 못하게 막을 수 없다면, 그것이 어린아이라면 그가 받는 충격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며칠을 앓아눕는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인생에서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죽음뿐이다. 생명은 유한하고 사람들은 하루하루 죽어간다.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잘도 모르는 체하면서 살고 있다. 어째서일까? 그때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이고 가장 불확실한 것은 죽는 때이다. 그래서 알면서도 잊고 살아가는 것일까.     


‘어째서?’가 가장 어이없는 물음이다. 어째서라니, 세상에 뚜렷한 이유가 있는 일이 몇 가지나 될까? 사람들은 대부분의 인간사가 원인과 결과가 있는 일이라고 믿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인지 알게 될 것이다. 어째서 나는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일까? 좀 더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 어떤 아이는 사랑 넘치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라는 걸까? 또 다른 아이는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학대받으며 자라는 걸까? 어째서 누구는 태어나자마자 사고로 죽고 누구는 큰 사고 현장에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것일까? 살면서 중요하고 결정적인 일들에는 대부분 이유가 없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망설이는 건 망설일 만하니까 망설이는 것이다. 다음부터는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일은 안 하는 쪽으로 결정하겠다고 다짐한다. 삶의 길이라는 것은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아무리 애써도 주어진 삶의 길이를 늘릴 수는 없다. 하루에 필요한 필수영양소를 꼼꼼하게 섭취하고 운동하고 명상하고 수백만 원짜리 보약을 챙겨도 그것이 삶의 길이에 관계하지는 않는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삶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은 죽는다. 금연, 금주, 규칙적인 운동, 깨끗한 공기와 물, 채식, 생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놀랍게도 삶 그 자체다. 살아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갔으므로 수명이 다했으므로 사람은 죽는다.     


생명의 탄생에는 예정일이라는 것이 있다. 출산 예정일을 알고 그 계절에 맞추어 출산을 준비한다. 몇 년 뒤에 학교에 갈 테니, 몇 년 뒤쯤이면 결혼도 할 테니. 인간 삶에는 대략의 예정이 있다. 예정이 있어야 준비도 할 수 있다. 죽는 날도 예정일이 있다면 어떨까? 그건 혹시 축복이 아닐까? 사는 동안에 열심히 살고 죽음이 가까워지면 그 준비를 하게 되지 않을까?      


존재는 빛을 발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존재 그 자체로만은 충분하지 않다. 무리 중에 눈에 띄려면 희소성이 있어야 한다. 특이함, 남과는 다름. 그러니까 ‘없음’이 눈에 띄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없기 때문에 존재가 빛을 발하는, 예를 들면 머리카락 같은 것이다. 대부분 머리카락이 있기 때문에 민머리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눈에 띈다.


삶과 죽음! 인간의 영원한 질문이다. 소설이든 철학서든 책을 읽는 시간만큼 삶과 죽음에 관해 생각해본다.


책 소개     

백넘버. 임선경 저. 2021.06.30. ㈜고즈넉이엔티. 260쪽. 12,000원.      


임선경-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 드라마 극본,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동화, 에세이, 소설을 쓰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태현 저 ‘백 년의 기억, 베스트셀러 속 명언 80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