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에 관한 이야기
애국가의 작곡가가 안익태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직 애국가가 국가로 법률적 제정이 안 됐다는 것을 몰랐다. 일제 강점기 국가를 잃은 한 젊은이가 외국에서 음악을 공부하며 애국가를 작곡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그 당시 애국가가 ‘올드 랭 싸인’이라는 외국곡을 빌려서 불린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애국심의 발로였다.
그런 그를 친일파 명단에 올리고 함부로 깎아내리는 논문을 펴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일부 인사들의 몰지각을 다시 알게 됐다.
광복된 지 70여 년을 넘긴 지금도 이런 논쟁과 불필요한 정쟁에 몰두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걱정하게 된다.
우리 국민 모두 이 책을 읽고 다시 애국이 무엇인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라를 잃고 외국을 방황하면서 자신의 꿈을 실현해 가는 안익태의 훌륭한 모습을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함부로 폄하하는 것은 매국적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안익태와 관련된 사실을 왜곡한 것을 바로잡으려는 작가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스페인에 사는 친구가 제시한 안익태 거주지에 무궁화꽃 묘목을 심고 싶다는 사업이 실현될 날을 기다린다.
-책 중에서-
“안익태 군의 편모” 학도와 같은 순진함,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그 희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멈추지 않는 강한 집념이 있는 그가 가는 길 앞에는 어떠한 장애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친일 인명사전이 사실관계와 학문성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특정인의 주장을 무분별하게 수용하여 역사적 인물 안익태를 친일 행위자로 단정한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안익태는 “한국 환상곡의 악보에 작곡에 대한 찬사 시를 한글로 적어놓았다.
“오, 한국이여!
우리 조상들이 잠들어 있는 땅
무궁무진 만만세
내 그대 자주색 산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대의 꽃들, 그대의 골짜기들
그대의 개울들이 부르는 그 맑은 노랫소리
언제나 내 가슴에 남아 있어라.
하나님이 그대의 청을 들어주시고
그대를 지켜주시고
그대의 노력을 헛되게 안 하시니
그대의 희생, 그대의 애씀이
적절하게 참된 보상을 받으리로다.
보통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세계평화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평화주의자 안익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음악은 세계인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도구임을 확신한 그의 음악철학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통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외세로부터 나타날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태극기와 애국가, 무궁화와 같은 역사성을 지닌 국가 상징물을 사랑하고 지키는 데서부터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책 소개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 김형석 저, 2019.07.25. 도서출판 교음사. 15,000원.
김형석 ; 건국대 사학과 졸, 경희대 대학원 박사, 총신대 전임대우 교수, 한민족복지재단 회장. 통일과 역사연구소를 운영하며 안익태 기념재단 연구위원장. 저서 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등
안익태(1906.12.05.~1965.09.16.)는
1906.12.05. 평양 계리에서 안덕훈과 김정옥 사이의 7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7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코넷을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신동, 1918년 숭실중학교에 입학, 숭실대 밴드부에서 활동, 첼로를 연주,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수감자 구출 운동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퇴교 처분을 당했다.
1919.10월 일본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 특기자로 입학, 1926년 국립동경 고등음악학원에 입학 첼로 전문연주 수학, 1930년 미국 유학, 신시내티음악원 등록, 1933년 필라델피아 템플대학으로 전학, 1935년 11월 애국가 작곡, 1937년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 졸업 1937년 11월 4일 영국에서 런던 제1 심포니오케스트라와 공연, 1942.03.12. 빈 연주회 직후 독일을 대표하는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사제 간의 연을 맺는다.
1944.06.12. 스페인 입국 바르셀로나 북쪽 해안 사가로에 정착, 1946.07.05. 스페인 여성 로리타 탈라베라와 결혼. 1962.5.1.~16.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 지휘. 1965.09.16.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