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경 소설
사람 사는 세상은 언제나 권력자와 서민이 공존한다. 소수의 인간이 다수의 인간을 다스리고 그들의 생각대로 세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울듯 영원한 권력도 영원한 승자도 없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서민들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역사에 파묻히고 잊혀진다.
이 소설은 196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막내딸을 윤원섭을 내세워 화자 이해동이 겪는 혼란기 서민의 삶을 이야기한다. 광복으로 몰락한 윤원섭은 사기죄로 형무소에서 복역을 하고 나온다. ‘언커크-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라는 국제기구가 윤덕영이 지은 유럽식 저택에 주둔하면서 호주 대표로 파견된 에커넌과 윤원섭이 저택에서 만나 이루어지는 이야기다.
소설은 등장인물을 통해 6.25 전쟁과 1966년 2월 3일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 서거를 말한다. 역사의 격변기에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풍속을 전한다. 친일파와 독립투사 이야기, 신식 양복과 한복이 혼용되고, 서양식 주택과 한옥, 일본식 건축물이 서울이라는 한 곳에 모여있는 풍경이 그려진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귀족과 서민들로 나뉜 인간 세상에 귀족들은 그들만의 어투와 복식으로 서민들과 구별한다. 귀족의 언어가 있고 귀족들이 입는 옷이 따로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민들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 차별을 통해 권위를 유지하고 사람을 부릴 수 있다. 몰락한 고관대작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안쓰럽다. 요즘 세상에서는 소위 명품이라는 물건을 가지고 있는 자와 못 가진 자가 비교되는 것이라고 할까?
작가는 이 세상에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힘’이라고 단정한다. “세상을 뒤바꾼 두 번의 전쟁과 왕조의 절멸과 윤덕영의 그 모든 악명으로도 그것을 뒤흔들지 못했다. 저택은 그의 눈앞에 확실히 존재하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아버지의 인쇄기처럼, 그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의심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꿋꿋하고 기세로운 그 저택의 힘에 기대어 오히려 윤덕영과 그 후손들은 부활을 꿈꾸었다.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들리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것들. 지난 석 달 동안 그것의 질긴 생명력을 경험하면서, 해동은 그것이 ‘힘’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세상에는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입장에서는 분하고 고까울지언정 그것이 아예 없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힘없는 자들, 서민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하잖은 것, 미미한 것들뿐이다. 그런 미미한 것들은 길가의 거미줄처럼 금세 더럽혀지고 아무 발길에나 찢어지고 제일 먼저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 증언해줄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그것이 실제 있었다고 말할 근거조차 희박해지는 것들 뿐이다.
언제나 권력의 언저리에 있는 자들은 뻔뻔하다. 잘못을 뉘우치는 법은 결코 없다. 뻔뻔한 자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득을 취한 것으로도 모자라 커다란 명예마저 챙기려 한다. 이익과 명예 둘 중 하나는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그들의 행태는 필연적으로 적의를 불러일으킨다.
언제나 사람들은 살아가고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고 인생이다. 한 권의 소설에서 조선조에서 근대까지 여행했다.
책 소개
영원한 유산. 심윤경 저. 2021.01.04. ㈜문학동네. 281쪽.
심윤경 – 2002년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제7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 시작. 제6회 무영문학상 수상, 『이현의 연애』 등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