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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서조 Apr 14. 2023

에이미 추아 지음 『제국의 미래』

세계 제패의 비결

 프랑스의 전 외무장관 위베르 베드랭은 미국은 모든 부문에서 우월 혹은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미국은 경제적, 군사적, 기술적 측면에서의 우위는 물론이고 태도와 개념 언어와 생활양식에서의 우위까지 손에 넣었다.     


제국의 조건

 이 책은 초강대국을 다루고 있다. 세계적인 패권 국가라는 말은 그 나라의 권력은 동시대의 경쟁국들이 장악한 권력을 분명히 능가해야 한다. 그 나라는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경제력, 혹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나라는 단순히 특정한 한 지방 혹은 지역에서의 우위라는 테두리를 넘어서서 지구상의 방대한 구역과 방대한 인구에 대해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이 책의 핵심적인 개념은 상대적인 관용이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관용이 세계 제패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 역으로 말하면 불관용은 초강대국의 쇠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 제국을 꿈꾸는가?

미국은 관용을 통해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성장한 전형적인 사례일 것이다. 현대의 미국은 안타깝게도 미국의 지배를 받는 세계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로마보다는 야만적인 몽골제국에 훨씬 가깝다.     

이 책의 1부는 근대 이전의 초강대국에 관해 서술한다. 1장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으로 시작해서 알렉산드로스 대제에서 끝난다. 2장은 로마제국에 관한 내용이고, 3장은 중국의 당 제국에 관한 내용이다.     

2부는 계몽화된 관용에 관한 내용이다. 서양에서 종교 전쟁이 시대는 서서히 계몽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5장에서는 계몽주의 이전의 대표적인 유럽 국가인 중세의 스페인을 간단히 고찰한다. 6장은 새로운 관용이 개념을 끌어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성장을 이룬 최초의 유럽 국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에 관한 것이다. 7장에서는 서양에서 눈을 돌려 세계적인 패권을 장악하지 못했던 중국의 명나라와 거대한 이슬람 국가였던 오스만제국과 무굴제국을 간단히 살펴본다. 8장에서는 대영제국의 영역은 영국 해군이 지배하던 대양을 포함하면 지구 표면의 70%에 이르렀다.      


3부에서는 9장에서 애송이 식민지였던 미국이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관용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볼 것이다. 10장에서는 불관용과 순수 인종주의라는 원칙 위에 세워진 두 강대국,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에 대해서 고찰한다. 11장은 현재 미국의 주요한 경쟁자들에 대해 고찰한다. 12장에서는 21세기에 시사점을 던져주는 과거의 교훈을 따져보고 특히 미국제국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살펴본다. 2500년간, 역사상의 모든 초강대국은 하나같이 똑같은 두 가지 도전에 직면해왔다. 그 한 가지는 자국의 성장에 연료를 공급했던 관용을 유지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자국의 지배를 받는 민족들에게서 충성심, 아니면 묵인이라도 확보할 수 있는 공통의 결속력을 형성하는 문제이다     


 참으로 모순된 이야기 같지만,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강대국으로서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것뿐이다.     


최초의 패권 국가, 페르시아-아케메네스

  아케메네스 왕조는 대략 기원전 559년부터 330년까지 강력한 페르시아제국을 통치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파라다이스는 고대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기원전 559년경 키루스 대제가 세우고 20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현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다양한 문화와 개방적인 종교를 갖추고 있었다. 전성기에는 세계인구의 1/3에 가까운 4,200만 명을 거느렸다.    

 

페르시아 왕국은 수많은 부족과 씨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아케메네스도 그중 하나였다. 이란이란 이름은 아리아의 왕국이라는 뜻의 페르시아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리우스, 모든 민족의 왕이 되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다리우스 대제 치세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다리우스는 약 40년 (기원전 522~486년) 동안 통치하면서 페르시아의 영토를 인도까지 넓히고 그리스에 발판을 강화했으며 동유럽까지 손길을 뻗었다. 다리우스는 뛰어난 행정가였다. 효율적인 행정제도를 만들어 페르시아를 역사상 가장 융성하고 가장 세련된 나라로 만들었다. 그는 고대 건축의 경이로 꼽히는 페르세폴리스를 세웠을 뿐 아니라 새로운 수도 시설을 건설을 감독했고 표준 화폐를 도입했으며 완벽한 도로망, 왕실 우편제도, 급행 배달, 화재 경보 등 통신 체계를 확대했다. 세금 제도와 조공 제도를 마련했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200년 동안 전례 없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관용 정책 덕분이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해당 지역의 법률과 전통을 포용하고 해당 지역의 언어, 종교, 예식을 용인하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피정복민의 반항과 반란을 최소화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인종이나 종교에는 개의치 않고 제국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장인들, 사상가들, 노동자들, 전사들을 활용하여 문화적 다양성을 통합력과 국력의 원천으로 변화시켰다.     


팍스로만, 세계인의 탄생-로마

  서구를 상징하는 제국을 하나 꼽는다면, 로마제국을 들 수 있다. 로마제국은 영토 면에서는 페르시아제국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 밖에 거의 모든 면에서 그 이전의 초강대국을 능가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전쟁 조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로마제국은 하나의 관념(idea)이었다.    

  

전성기에 로마제국 안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6,000만 명에 달했다. 로마의 문명은 베르길리우스와 세네카 같은 시인들과 철학자들, 의사 갈레노스, 그리고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를 낳았다.     

로물루스가 전설적인 도시국가 로마를 건국했던 기원전 753년부터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튀르크에 함락된 서기 1453년까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로마의 영광은 지속되었다. 대부분이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70년부터 서기 192년까지가 로마 문명의 정점기였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코스모폴리탄 로마

  기원전 275년이 되자 로마는 이탈리아 북부의 루비콘강에서 이탈리아 남부 연안이 메시나 해협에 이르는 약 12만 5,000㎢의 영토를 둔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가 되었다. 대제국 로마는 현대의 시카고학파가 우쭐대면서 떠벌리고 있는 전 지구적인 차원의 경제와 자유무역, 시장 개방을 일찌감치 실현한 본보기였다. 기원전 289년 로마는 제국이 상업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청동 동전을 주조했다.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

 로마에는 현대적인 의미의 인종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사람들은 윗사람에게는 아첨하고 아랫사람에게는 교만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짧지만 격렬한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서 제위에 올랐고 서기 312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중국의 황금기 - 당(唐)     

618년 한족과 돌궐족의 피가 섞인 북부 벌족 출신의 이연이 수나라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후 군사를 이끌고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당 왕조를 열었다. 당 왕조는 그 후 300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게 된다. 당 왕조가 창건된 순간부터 이세민과 그의 형제들은 권력 다툼을 벌였다. 626년 이세민은 황태자인 형을 죽이고 자신의 부하가 동생을 죽이는 것을 방관했다. 그는 아버지를 황제의 자리에서 내몰고 황제로 등극하여 20년 이상 통치했다.     


1258년 2월 5일 몽골 군대는 일주일 동안 침수와 포격 작전을 펼친 끝에 바그다드 동쪽 성벽을 무너뜨렸다. 칼리프는 며칠 뒤에 항복했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단순한 유목민 무리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 중국, 중아아시아, 러시아, 카르카스, 그리고 이란의 통합된 인적, 재정적, 물질적, 기술적 자원에 굴복한 것이다. 훌라구는 칼리프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칼리프와 그의 후계자들을 카펫에 말아 발로 짓밟아 죽였다. 이런 형벌은 고귀한 집안 출신들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었다. 몽골 군대는 기독교의 십자군들이 200년 이상 이루지 못했던 칼리프 타도를 단 2년 만에 이루어냈다.     


몽케칸은 루브룩의 월리엄에게 불교도, 이슬람교도, 그리고 기독교도로 구성된 세 명의 심판관이 입회하는 토론회에 참석하라고 했다. 토론회는 “말다툼을 일으키는 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제1의 원칙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인류학자인 잭 웨더퍼드는 이 토론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첫 토론에서 루브룩의 윌리엄은 중국 북 출신의 불교도와 마주 앉았다. 그 불교도는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죽은 뒤에 영혼은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윌리엄은 첫 번째 질문은 만물의 근원인 신에 관한 질문이 되어야 한다면서 그 불교도가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심판관들은 첫 득점을 윌리엄에게 주었다. 선과 악, 신의 본질, 동물의 영혼 문제 환생의 문제, 그리고 악을 만든 것이 신인가 하는 문제 등을 둘러싸고 결론 없는 토론이 이어졌다. 이 박식한 사람들은 한 차례의 토론이 끝난 뒤에는 다음번 토론을 준비하며 술을 마셨다. 알코올의 효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기독교도들은 논리적인 주장으로 남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슬람교도들은 노래를 합창하는 기독교인들을 압도하기 위해서 큰 소리로 코란을 암송했고 불교도들은 고요히 명상에 잠겼다. 그들은 상대방을 개종시킬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이 토론회 역시 몽골인들의 잔치가 대부분 그렇듯이 참석자들이 더 이상 토론을 계속할 수 없을 만큼 술에 취하면서 끝이 났다.     


쿠빌라이는 황실 전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중국 남부를 정복하고 중화 왕국을 재통일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쿠빌라이의 치세는(1260~1294) 1276년 웅장한 송의 수도 항저우가 몽골 군대에 항복하자 중국 최대의 보물인 부유한 도시들과 번창하는 항구들, 막대한 규모의 엄격하게 훈련된 해군들이 쿠빌라이의 손에 넘어왔다. 이로써 재통일된 중국은 1억 1,000만에서 1억 2,000만 명의 인구들 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되었다. 그는 중국식 칭호를 채택하고 선조들에게 중국식 이름을 붙였다. 중국식 수도를 건축하고 중국식 황실 의식을 따랐으며 원(元)이라는 이름의 중국 왕조를 창시했다. 몽골의 중국 지배는 1368년에 끝이 났다.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 - 스페인

  강제 개종은 이른바 개종한 유대교도를 뜻하는 콘베르소스라는 계층을 탄생시켰다. 1391년 세비야에서 유대교 학살이 일어났다. 1492년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유대교도들에게 카톨릭교로 개종을 하거나 4개월 안에 스페인을 떠나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1502년 카스티야의 이슬람교도들은 개종하거나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대부분 개종을 선택함으로써 ‘모리스코스’라는 거대한 집단이 탄생했다.     


1400년대가 끝날 무렵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통치 아래 통일된 스페인 왕국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나라였고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그러나 이단 심문소, 추방, 순수한 혈통을 옹호하는 법령 등이 빚어낸 불관용은 스페인에 파멸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      


자본주의 경제를 제패한 최초의 제국 - 네덜란드

  네덜란드에는 유명한 것이 많다. 나막신, 풍차, 튤립, 레브란트. 베르메르.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이 한때 영국보다 앞서 세계를 주름잡던 해상 무역 제국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적 맥락에 따라 저지국(低地國), 네덜란드, 네덜란드연방공화국, 네덜란드 주 연합, 홀란트(암스테르담, 델프트, 하를렘, 헤이그, 라이덴, 로테르담 등 주요 도시가 포함되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두 개의 지역, 즉 북홀란트와 남홀란트만을 가리키는 말이다.)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1600년대 초에는 네덜란드의 상업주의와 식민주의가 폭발적으로 팽창하여 전 세계를 휩쓸었다. 1605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향료제도(Spice Islands)를 포르투갈에서 빼앗았다. 1597년 투른하우트 전투에서 전사한 스페인 병사는 약 2,250명이었던 반면 네덜란드의 전사자 수는 네 명뿐이었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아케인젤에서부터 레시페까지 그리고 뉴암스테르담에서 나가사키까지 각지에 교역소와 요새화된 공장들을 갖추고 있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세계 최대의 무역 국가였다.      


철학자들의 은신처

  네덜란드는 오래전부터 검약한 민족으로 명성을 날렸다. 오언 펠덤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달걀 껍데기 하나까지 아낄 정도로 검약하다고 비난했다. 17세기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문화적, 예술적, 지적, 독창성을 분출했다.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렘브란트, 베르메르, 프란스 할스, 얀 스텐, 야코프 반 루이스달은 모두 이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들이다. 17세기 사상계의 위대한 3인방인 데카르트, 바루흐 스피노자, 존 로크도 그곳에서 글을 썼다.     


네덜란드의 영국 정복

  1688년 대규모 네덜란드 함대가 영국을 기습하고 네덜란드 보병대가 런던을 점령했다. 네덜란드 총독인 오라녜공 빌렘 3세는 영국왕이 되어 아내인 메리와 함께 통치했다.     


불관용의 덫 - 오스만, 명, 무굴

오스만튀르크족에 의해서 세워진 오스만제국은 대략 1300년경부터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지속되었다.

전성기때 오스만제국의 영토는 빈의 경계에서 홍해까지 아프리카 북부에서 발칸제국까지 뻗어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패권과 영화는 1520년부터 1566년까지 통치했던 술래이만의 치세에서 절정에 달했다. 16세기에 예니체리(왕실 친위대-8세에서 20세에 이르는 피정복 기독교 지역 출신의 젊은 남성들 가운데 일정 비율을 조세라는 명목으로 징집했다.)는 유럽의 군대들 가운데 가장 훈련이 잘 되어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했다. 약 2만 명의 병사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토박이 터키족 출신은 한 명도 없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슬람교의 인종적, 민족적 관용은 오스만제국의 대단한 전략적 자산이었다.     


무능한 13명의 술탄들

술레이만 이후 왕위를 계승한 열세 명의 술탄들은 무능한 사람부터 우둔한 사람까지 가지각색이었다.     


월등한 기술력을 보유한 명 왕조

  15세기 초반 명나라는 이슬람교도인 환관 정화에게 2만 8,000명이 넘는 인원을 실은 300척의 거대한 보물선을 맡기고 일곱 차례에 걸쳐서 인도양을 누비는 웅장한 항해를 하게 했다. 1421년 명의 거대한 해군은 세계 모든 나라의 해군을 왜소한 난쟁이로 만들었다. 명의 함대는 거대한 돛대가 아홉 개나 세워져 있는 보물선뿐 아니라 1,350척의 초함 400척의 전함, 그리고 곡물 식수, 군마를 실은 400척의 화물선을 비롯, 도합 4,000척이 넘는 배로 이루어져 있었다. 명 왕조는 1644년까지 지속되다가 만주족에게 정복당했다.     


인도의 막강한 제국 무굴

  영국에 앞서 인도를 통치하던 무굴제국은 칭기즈칸이 후손들이 세운 나라이다. 전성기의 무굴제국은 인도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일부를 다스렸다. 무굴제국의 황제들은 같은 시기에 통치했던 오스만제국의 술탄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였다.     


무굴제국의 창건자인 바부르가 피비린내 나는 광신의 물결을 타고 권력을 잡은 것은 사실이다. 바부르는 열 배나 많은 병력을 거느린 라지푸트족의 왕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힌두교도와의 전쟁을 ‘지하드’ 즉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이슬람 병사들을 열광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바부르는 겨우 4년을 통치하고 사망했다.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악바르는 30세가 되기 전에 조정 내에서 권력을 확고히 다졌다.     


악바르가 죽을 때까지 거느린 배우자의 수는 300명이 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라지푸트족 아프간족 남인도 왕국의 공주들 터키족 페르시아인이 포함되어 있었고 포르투갈 태생의 기독교도 여성이 두 명이나 있었다. 인도는 아우랑제브가 뿌려놓은 증오심과 갈등 때문에 영국의 분열 정복 전략의 희생양이 되었다.     


세계 최대의 해상국가 - 영국

  빌렘과 메리가 즉위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1689년 영국 의회는 권리장전과 관용법을 통과시켰다.     

현대 세계에서 관용의 의미는 계속 달라지고 있다. 고대 제국들은 훌륭한 말이나 노새를 부리는 것처럼 우수한 집단들과 인재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순전히 수단적인 의미의 관용을 베풀었다. 이런 관용으로는 자유, 평등, 자치라는 현대적인 이념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1707년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의 합병조약에 서명하면서 대영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아일랜드와 결별

  아일랜드 사람들은 대영제국에서 스코틀랜드나 웨일스 사람들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 주요한 이유는 종교에 있었다. 1700년 당시 스코틀랜드, 웨일스, 잉글랜드의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개신교를 신봉하고 있었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은 가톨릭교를 완강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영국 역사에서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는 오랫동안 심각하게 반목해왔다.      


1947년 영국 정부는 인도 아대륙이 분할을 공표했다. 이렇게 해서 인도와 파키스탄 두 개의 독립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1860년대부터 자진해서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의 백인 주민들에게 주기 시작했다. 1838년 더럼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령 캐나다 주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 멀리 떨어진 권력의 통치로 부터 벗어날 권리가 있었다.     


세계 제패의 미래

최첨단 과학 기술의 개척자 - 미국     

추축국의 야욕 - 독일, 일본

121세기 새로운 도전자들 - 중국, 유럽연합, 인도     


제국의 미래     

최첨단 과학 기술의 개척자 - 미국

  대영제국은 황금기에 지구 표면의 1/4, 세계인구의 약 1/4을 통치했다. 하지만 영토로 따지자면 칭기즈칸이 몽골제국이 통치했던 영토가 훨씬 넓다. 지금 미국이 다스리는 땅은 지구 표면적의 6.5%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은 초강대국이다. 미국이 과거의 모든 초강대국이 그랬듯이 미국이 강한 국력을 유지하고 있는 참된 비결은 인적 자원에 있다. 현재 미국 인구의 95% 이상이 바다를 건너온 이민자들의 후손이다.     

강압이 어떤 효과를 낳았는가? 세상 사람들 가운데 절반은 바보가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위선자가 되었다.     

1820년부터 1914년 사이에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수는 3,000만 명으로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암살되었다.      


미국, 세계를 지배하다.

세계화란 곧 잉여 자본이 주변 국가에서 중심 국가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중심은 바로 미국이다.-조지 소로스     


실리콘밸리의 건설자, 클라이너

  유진 클라이너는 18세 때인 1941년 나치 점령 직전에 빈을 떠나 미국에 도착했다. 클라이너는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었지만, 공학 학위를 받고 브루클린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클라이너와 그의 동료들은 페어차일드 반도체 회사를 차리고 그 회사의 임원이 되었다. 2003년 사망한 클라이너는 실리콘밸리를 건설하고 벤처 자금을 사실상 발명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20세기 후반기를 바꾸어 놓은 디지털 혁명

  그로브의 관리를 받으면서 인텔은 1990년대 말에 1억 1,500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과학 기술은 미국에게 등을 돌렸다.     


추축국(樞軸國)의 야욕 - 독일, 일본

  20세기 중반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 대단히 편협했던 이 두 정권은 엄청난 권력을 손에 넣고 세계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추축국(樞軸國)들의 급속한 부상은 극단적 불관용이 무서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런 불관용을 토대로 한 사회는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추축국(樞軸國2차 세계 대전 때에 일본독일이탈리아가 맺은 삼국 동맹을 지지하여 미국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국과 대립한 여러 나라. 1936년에 무솔리니가 유럽의 국제 관계는 로마아 베를린을 연결하는 선을 추축으로 하여 벼화할 것이다.’라고 연설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1940년 6월 21일 오후 3시 15분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최고 사령관들은 프랑스의 항복을 받기 위해서 파리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콩피에뉴 숲에 도착했다. 1,000년이 넘게 프랑스 황제들의 사냥터였으며 잔 다르크가 잡힌 곳인 이 신성한 숲을 히틀러가 선택한 것은 또 다른 역사적 사건 때문이었다. 독일은 1918년 11월 이곳에서 프랑스에 항복했고 그로서 제1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1919년 조인된 베르사유조약은 독일에게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인정할 것을 강요했다. 독일은 그 벌로 어마어마한 전쟁배상금을 부과받았고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몰수당했다.     


일본 : 가장 “덕이 높은” 자의 정복

  1940년 8월 1일 일본 외무성 대신 마쓰오카 요스케가 일본이 영토 확장계획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1945년 이 거창한 계획은 일본이라는 나라와 함께 시커먼 연기를 뿜는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사람들의 충성심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관용뿐이다.     


21세기 새로운 도전자들 - 중국, 유럽연합, 인도     

중국; 최저 소득국에서 외국인 투자 1위국으로

  2030년이 되면 중국 경제는 미국 경제의 세 배 규모가 될 것이라고 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해외 중국인들은 중국에 1,90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 이 돈은 중국이 유치한 외국인 직접 투자액이 절반을 넘어서는 규모이며 중국을 제 3세계의 개천에서 “떠오르는 용”으로 급상승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중국이 초강국의 지위까지 상승하리라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논지에 따르면 초강대국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초강국 중국의 존재는 양극화된 세계질서로의 복귀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유럽연합 : 다양성 속의 통일

  2004년 5월 1일 시계가 자정을 알리고 샴페인 잔 이 서로 부딪히는 가운데 유럽연합은 신입 회원국들의 가입을 공식적으로 환영했다. 이로써 유럽연합은 15개국에서 25개국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유럽연합의 영토 확장은 군사적 정복에 의지하지 않고 자격 부여와 동의라는 수단에 의지한다. 이는 매우 새로운 형태의 전략적 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연합은 미국의 패권에 맞선 반제국주의적 도전의 일환으로써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계몽주의적 가치를 옹호하는 참된 횃불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려고 노력한다. 다양성 속의 통일을 지향하는 유럽연합의 태도는 유럽의 새로운 도덕적 민감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자유 시장의 이윤 추구 논리를 따른 것이다.     


인도 : 급격한 성장, “어디에나 인도”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

  인도는 세계인구의 17%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규모는 전 세계 생산량의 2%, 전 세계 무역량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인도 국민의 약 80%는 하루 2달러 남짓으로 살아가고 있다. 유엔 인간개발지수에 따르면 인도는 177개국 가운데 127위이다. 인도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해야 할 사항은 세계 최대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이다. 인도는 미국을 능가할 정도로 민족적 종교적으로 다양한 나라이다. 인도에는 16개 공식 언어가 있고 100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가 22개가 넘으며 방언은 1,000개가 넘는다. 인도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관용의 승리를 의미한다. 현대 인도 건국의 주역인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는 20세기에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관용을 주창했다. 인도 주민의 절반 이상이 25세 이하이다. 서구의 중산층들이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서 조국을 떠나 인도로 이주하는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제국의 미래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이며 이민자들의 나라로는 처음으로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정복이 아니라 교역을 통해서 패권을 장악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국력과 자유의 원천일 뿐 아니라 국외자들을 끌어당기는 엄청난 매력의 원천이다. 미국의 민주정체는 무수히 많은사람들에게 경제적 성공을 안겨준,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미국의 자유 시장 제도와 더불어 특별히 현대적인 형태의 전략적인 관용으로 특징 지워진다.     


반미주의는 중동의 이슬람권에서 가장 극심하다. 9·11 이후 미국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은 국제범죄재판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기후변화에 관한 교토의정서를 외면하고 유엔의 승인이나 전통적인 NATO 동맹국인 프랑스, 독일, 캐나다의 지지도 없는 상태에서 이라크를 침공했다.     


마지막 패권 국가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정당성과 동의에 기초하고 있다. 제국은 민주주의 이념과는 어울리지 않는 강압이라는 요소를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성공과 지도력에 더 많이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여기서는 다음 세 가지 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이민 정책이다. 이민자의 나라라는 유산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은 국경에서의 출입 통제가 용이하지 않고 테러리즘의 위협과 남미 출신 이민자들의 대거 유입에 대한 광범위한 반발이 일고 있다.     

둘째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이민 정책은 미국과 비미국인 간에 호의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셋째 가장 중요한 측면인데 과거에 세계를 제패했던 모든 강국이 그러했듯이 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것은 세계에서 가장 값진 인적 자본을 끌어들이고 동기를 부여하는 면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앞질렀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는 9·11 이후 미국의 이민 정책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똑똑한 인재들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그들을 쫓아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방주의와 다자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미국은 모든 분야에서 다른 나라들과 조화를 이룬 다각적인 활동을 육성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21세기에는 미국의 주요 경쟁국들은 수많은 자체 문제에 직면하고 있지만, 점점 강해지고 있으므로 미국은 가까운 미래에 패권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결국 초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역사의 이변이고 이득과 함께 희생까지 떠안아야 하는 일이다.     


책 소개

에이미 추아 지음. 『제국의 미래(DAY OF EMPIRE)』 이순희 역. 2008. 5. 23. 비아북, 25,000원.


에이미 추아 : 중국계 미국인 2세, 1987년 하버드대학교에서 국제법으로 박사학위, 듀크, 스탠퍼드, 뉴욕대학교를 거쳐 현재 예일대학교 법학 교수로 있다. 국제 경영과 인종 갈등 국제관계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   

  

이순희 -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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