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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서조 Jun 17. 2023

해이수 지음 『탑의 시간』

헤이수 소설

10월의 마지막 날, 그리고 밤이다. 


일 년 중 10월의 마지막 날은 일 년을 다 돌려보내는 마지막 고비에서 두 달 남기고 가버린 세월을 뒤돌아보는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날 ‘탑의 시간’을 읽었다.     


버마, 지금은 미얀마로 국호를 바꾼 동남아 여행지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로 네 명의 남, 녀 와 또 한 여자의 이야기다. 유부남을 사랑해서 떠나야 했던 50대의 여인 ‘연’, 같이 떠나기로 약속했던 여인의 이별을 통보받은 남자 ‘명’, 이제 사랑을 시작하는 ‘최 와 희’, 그리고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한 ‘그녀’가 사랑과 이별을 이야기한다.     


인생은 예정표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여행길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진다. 

미얀마 바간에는 2,000개가 넘는 탑이 있다. 탑마다 사연이 있다.      


사람도 각자 살아온 인생이란 사연이 있다. 사랑은 탑처럼 쌓이는 것이다. 

기쁨과 미움, 슬픔과 환희를 층층이 쌓으면서 견고한 구조물로 남는 것, 무엇보다 함께 쌓는 것이다. 

우리가 여태 쌓아온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그녀는 왜 함께 쌓기를 포기한 것일까? 

여자의 마음을 남자는 모른다.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알까?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일은 전개된다.     


여행길에 서로 사랑하기 위해 왔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이 끼어든다. 

그리고 선택은 여자가 한다. 그래서 하나의 사랑은 깨지고 새로운 사랑이 싹튼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미얀마의 수많은 탑은 이런 사연을 쌓고 또 쌓은 것이리라. 

현실적으로 불가한 도덕적 사회적으로 인용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충동에 대항할 겨를도 없이, 상대에게 어쩔 수 없이 빠지는 것이 사랑일까. 사랑이란, 본인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외로움에 늙어간 남자와 사람을 사랑해서 겪는 서글픔으로 늙어간 남자의 얼굴에 주름과 표정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속에 비밀이 없는 사람이다.’ 

그저 세월을 따라 늙어간 자와 사랑의 통증으로 늙어간 자가 같은 주름과 표정을 가질 리가 없다. 

그것은 나이테처럼 분명히 새겨진 것이고, 이런 종류의 나이테를 알아보는 것은 실연의 시련을 겪은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저 사랑이 지나가는 통로일 뿐이다. 

그것이 내 것이 아니기에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떠나보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들어온 사랑이 빠져나갈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나가는 것이다.      


심지어 어딘가에 이미 쓰인 책의 내용에 따라 자신이 살아왔고 사랑을 앓았으며 곧 죽을 것이라는 예감. 

돌아가기를 바라지만, 이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밤과 속삭임, 웃음과 고백, 손길과 눈길, 사람의 향기와 온기와 그런 이야기 모든 것이 찰나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을 움직이는 손은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세상과 시간이다. 

나는 나를 연기할 뿐이고, 너는 너를 연기할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라는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세상과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과 시간의 응집체인 탑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그렇게 인간이라는 체스 말을 움직여보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 어차피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그렇게 쌓여 가는 것이 인생이다.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속에 비밀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문구에 나에게 물어본다. 나는 가슴속에 비밀 한 가지라도 있나? 한 사람에게 알려야 하는 탑 속에 숨긴 비밀이 있는가? 없다. 그것은 추억이 없다는 것과 같다. 나는 가난하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비밀 한 가지 만들어야 하겠다.     


책 소개     


해이수 지음 『탑의 시간』 2020.12.02. ㈜자음과 모음. 199쪽. 13,800원.

    

해이수 :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심훈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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