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가 낱낱이 짚어낸 대한민국의 문제
우리는 새로 등장한 것을 환영하기보다 이미 있는 것들을 지키는 일에 더 익숙하도록 훈련되어 있고, 미래를 여는 일보다는 과거를 지키는 일에 더 익숙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이 채우는 사회는 모든 문제가 과거 논쟁으로 빠지고, 과거를 파헤치는 일에 빠져야 진실한 삶을 사는 느낌이 들게 되어 있다.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튀어나오는 일인데, 이 궁금증과 호기심은 본질적으로 아직 해석되지 않은 세계, 즉 미래를 향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질문하는 힘은 매우 약하고 대답하는 능력은 매우 강하다. 이 말의 의미는 간단하다. 우리에게는 과거에 갇히기 쉬운 경향이 있고, 미래를 열기에는 매우 어려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무능하면 그 안의 구성원들은 개돼지만큼의 존엄도 갖지 못하는 것이 세상사다. 1910년 8월 29일 경술년 국치일은 법적인 요식행위일 뿐, 훨씬 전부터 우리는 국치의 세월을 견디는 슬픈 백성이었다. 우리가 가진 착각 비슷한 것이 또 하나 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줄 아는 것이다.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의 도움이 없었으면, 1945년 8월 15일 독립도 없었다. 해방은 우리 손으로 한 것이 아니다.
조국 분단이 철천지원수가 바로 세상물정 모르고 살았던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무지하고 무능해서 스스로 지키지 못한 일임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외세의 간섭 아래 황망하게 국가를 세우면서 친일 세력을 완전히 척결할 수 있는 독립적 구조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룬 해방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 이런 구조를 무시하고 북한은 친일파를 완전히 척결했는데, 대한민국은 친일파를 척결하지 않았다고 먼저 정해놓고 말하면 안 된다.
현충원도 대한민국 현충원이다. 김원봉을 아무리 존경하고 좋아하더라도 대한민국에 적대적인 경력이 있으면 국립 현충원에 모시려고 시도하면 안 된다. 대한민국의 일은 철저히 대한민국의 일로만 따지는 배타적인 태도가 국가에는 당연하다.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는지 아니면 대한민국과 싸웠는지를 따지는 것 외에 다른 기준이 끼어들면 안 된다. 국가의 정통성이나 정기로 민족정기를 살릴 수는 있지만, 민족정기로는 국가의 정통성이나 정기를 살릴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민족에는 군대도 없고 조세 수입도 없지만, 국가에는 군대도 있고 조세 수입도 있기 때문이다. 통일은 국제법과 국내법을 토대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해결할 일이지, 민족 감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치는 말로 피우는 꽃이다. 말이 곧 정치다. 좋은 정치에서는 말이 빛나고, 나쁜 정치에서는 말이 천박하다. 나라를 발전시키는 정치에는 우선 미더운 말들이 있다.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데서는 거짓말이 난무한다. 정치가 잘되는 나라에서는 정치인들의 말이 교과서에 실리지만, 정치가 길을 잃으면 학생들에게는 정치인들의 말을 되도록 듣지 못하게 하고 싶어진다. 혁명은 정치가 파괴되어 야만으로 돌아간 다음에 새 문법과 새 말을 세워 새로워지는 일이다. 새 말고 새 문법은 신뢰 없이는 서지 못한다. 혁명은 신뢰를 잃은 말을 신뢰 있는 말로 바꾸는 과격한 사건이다. 결국에는 문법의 혁신이고 말의 교체다.
임진왜란은 뼈에 새겨야 할 치욕이다.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에 반드시 새겨야 할 교훈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한 사람이 정세를 잘못 판단하면 천하의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둘째,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국방을 다룰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다. 셋째, 전쟁 같은 큰일이 닥쳤을 때는 반드시 나라를 도와줄 만한 우방이 있어야 한다. 누가 대한민국의 차기 대통령이 될지 모르지만, 모든 국민은 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하는 자가 감당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점은 그 말이 옳은지의 여부다. 누구든지 자신의 말이 옳은 말이라고 한다. 전문 사기꾼도 스스로 옳은 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지 않으면 사기는 성공하기 힘들다. 세상의 모든 말은 각자에게 다 옳은 말이다. 세상의 다툼은 옳은 말과 옳은 말 사이의 다툼이다. 그래서 세상은 해결되는 일이 없이 언제나 혼란스럽다. 옳은 말과 그른 말 사아의 다툼은 간단한 일이지만, 옳은 말과 옳은 말의 다툼은 논쟁과 토론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주도권은 옳고 그름 너머의 다른 어떤 힘을 가진 자에게로 간다. 그래서 주먹이 있고, 정치가 있고, 전쟁이 있다. 말만으로 안 되기 때문이다.
삶은 정치 영역에서 종합적으로 노출된다. 정치는 말이다. 그런데 말이란 것이 말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의하지 않으면 설득력이 없다. 지도자가 발휘하는 힘은 공동체가 주는 존경에 의지한다. 존경을 받는 사람이 발휘하는 흡인력을 매력이라고 한다. 지도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말 이상의 어떤 것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비극은 매력을 상실한 좌파와 우파 두 세력의 매력 없는 충돌에 하릴없이 운명을 맡겨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프레임 씌우기가 더 자연스러워져 버렸다. ‘빨갱이’라는 프레임 씌우기로 고통받은 적이 있던 사람들은 위치가 바뀌자 친일파라는 프레임을 씌우기에 바쁘다. 이런 토양에서 건설적인 정치와 외교와 정책이 실현되기는 불가능하다. 척박한 땅에서는 거친 풀이 자란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사람이란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감각과 감성보다는 숙고와 사실에 기대는 사람이다.
인간에게 가장 수준 높은 일 가운데 하나가 불편함을 느끼고 문제를 발견하는 일이다. 불편함이나 문제를 발견할 때 인간이 하는 최초의 지적 활동이 질문이다. 불편함이나 문제를 해결한 결과를 숙지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의 지적 활동을 대부분 대답으로 채운다.
대답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먹어서 누군가 요구할 때 뱉어내는 일이다. 이때 가장 중시되는 일은 누가 더 빨리 뱉어내는가,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는가, 누가 더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는가다. 대답이라는 활동이 가장 높은 단계에서 제도적으로 운용된 것이 ‘고시高試’일 것이다. 대답의 최상위 전문가들을 선발하는 제도다. 여기서 급소는 ‘원래 모습’이다. 원래 모습을 시제로 따지면 과거다. 그러다 보니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은 미래보다는 과거를 살게 된다. 이런 인재들이 채우는 사회의 거의 모든 논쟁이 다 과거 논쟁으로 빠지는 이유다.
과거를 한 점 오류 없이 철저히 따져야 진실하게 산다는 생각이 들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에 입으로는 미래를 말하면서도 정작 몸은 과거에 붙어 있다. 또 ‘원래 모습’이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기준에 맞으면 선(善)이라고 하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악(惡)이다. 이렇게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로 채워진 사회의 거의 모든 논쟁은 다 선악 논쟁이다.
대답하는 훈련만 하면 진위를 따지는 명분이나 선악을 따지는 도덕 감성에 갇힌다. 보이는 그대로 세계를 보지 못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만 본다. 혀율성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문제 없는 것을 간주한다. 세금을 풀어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망한 나라들이 우리 앞에 이미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길을 그대로 따라 간다. 우리만은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의식을 조작하는 확신범이 된다.
나라나 기업이나 망해가는 줄 모르다가 졸지에 망한 경우는 거의 없다. 망해가는 줄 알고, 심지어 망해가는 것을 보면서 망해간다. 정약용이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라고 경고했지만, 70여 년 만에 나라는 망했다. 조선의 실력은 경고를 듣고 개선에 나설 정도가 못 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도 사실을 이 지경에 이르렀다. 보지 않고 듣지 않을 뿐이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행하는 행위를 용기라고 한다. 용기는 매우 지적인 활동이다. 감각과 감성과 맹목적인 믿음에 빠지지 않고 곰곰이 생각할 수 있으면 지적이다. 감각과 감성에 갇혀 있는 사람은 지적이지 않기 때문에 용기를 발휘하지 못한다.
개인도 대개는 스르로 무너진다. 고치지 못하는 나쁜 습관, 절제하지 않은 욕망, 갇힌 사고,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는 오만함, 같은 방법만 고집하는 꽉 막힘, 불친절함, 질투, 혼자만의 선의지, 호기심 소멸 때문에 스스로 비효율성을 쌓다가 자신이 고갈 되어가는 줄도 모른 채 어느 순간 무너져 버린다. 모든 패망은 자초하는 경우가 십중팔구다.
왜 망하는가? 간단하다. 비효율이 쌓여 힘이 빠지기 때문이다. 왜 효율성을 상실하는가? 흐름에 맞춰 변하지 못해서다. 시대의 변화에 맞추지 못하는 것이다. 시대에 맞는 적절한 어젠다를 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대에 맞는 어젠다를 세우고, 그 어젠다를 중심으로 세력이 결집하면 효율성이 증가하여 국가가 발전한다.
부지런히 하고 있지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사실은 잘 모른다. 이 착각을 착각으로 알아차리고 빠져 나오는 일을 ‘각성’이라고한다. 이런 각성이 없는 지성은 자기 프레임에만 갇혀 새 비전을 만드는 변화를 감행하지 못한다.
문제없는 부부도 없고, 문제없는 국가도 없다. 문제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미래적으로풀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다루는 능력이다. 모든 발전은 문제를 해결해 가는 노력의 결과다. 문제를 다루는 능력을 발휘하면 얼마든지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번에 터진 사건을 국가 흥성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다만 그전에 해왔던 방식이나 자신에게 익숙한 프레임으로 해결하려 덤빈다면,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낡고 지친 피를 젊고 새로운 피로 바꾸는 도전이 필요하다.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공자는 말한다. “진정한 리더는 말한 대로 해야 한다. 그 말에 대해서 구차하게 변명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말대로 되면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고, 말대로 안 되면 설명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구차해지는 것이다. 구차한 설명을 하기 시작하는 시점과 일이 비틀어지기 시작하는 시점은 절묘하게 일치한다. 대한민국의 작금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계엄령이 대통령의 권한인데, 구차한 변명으로 탄핵을 자초했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은 “내가 존경한다고 하니까 진짜 존경하는 줄 안다”라는 구차한 변명을 한다. 나랏 꼴이 이렇다.
중국에 고염무라는 사상가가 있다. 그는 『일지록』이라는 책에 세상사 흥망에 관한 글을 남겼다. 나중에 양계초라는 사람이 책 내용을 ‘천하흥망 필부유책’이라는 여덟 글자로 개괄했다. 천하의 흥망은 필부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고염무는 ‘정권이 망하는 것은 그 정권을 잡았던 엘리트들의 책임이지만,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면 이는 보통 사람 모두의 책임이다.’라고 말했다.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그 나라를 떠받치던 공통의 가치관이나 법질서가 믿음을 상실하고 흔들리는 일이다. 구성원 일부가 동요하는 경우와 다르다. 구성원 전체가 중심을 잡기 어려워 비틀거린다.
정치는 그 사회의 얼굴이다. 정치의 수준은 그사회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한다. 고염무가 볼 때, 나라 자체가 흔들리는 일은 단순히 정치적 사건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런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이미 조성되어 있는 나라 전체의 문화에 이유가 있다. 정치적인 개별 사건에 의해서는 겨우 정권이 바뀔 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나라의 틀을 뒤흔들 정도라면 이는 전체적인 문화적 행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진화는 용기로 빚어진다. 단순한 이말은 생물의 진화, 문화의 진화, 정치의 진화, 개인의 진화(성숙) 등 다양한 경우에 다 맞는다. 그것이 용기인 이유는 두려움을 떨쳐내면서 편안함을 박차고 길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발전하고 변화하는 일은 이미 가진 것을 더키우고 강화하는 일로도 가능하지만, 그보다 더 많게는 아직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옮겨가면서 일어난다. 모든 진화는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으로 탐험을 떠나는 용기다.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은 알 수 없어서 항상 불안하고 무섭고 이상하다. 거기는 두려운 곳이다. 모든 진화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로만 일어난다. 진화하려고 하면 용기를 내야 한다.
인간이 사는 무대는 두 덩어리로 되어 있다. 하나는 인간이 만든 덩어리, 다른 하나는 인간이 만들지 않은 덩어리다. 인간이 만들지 않은 덩어리는 인간과 관계 없이 자기가 가진 원칙에 따라 알아서 스스로 돌아간다. 이것을 자연이라고 한다. 다른 한 덩어리는 인간이 만들었다. 문명이다. ‘문文’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다 인간의 손이 닿았다는 뜻이다. 인간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화적 존재다. 즉,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다. 이 정의가 내려지는 순간, 인간은 두 층으로 격이 나뉜다. 누구는 변화를 야기하고 누구는 변화를 받아들인다. 변화를 야기하는 문화적 활동을 하는 사람을 자유롭고 주체적이며 독립적이라고 표현하고, 야기된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종속적이라고 한다.
사람이 사람으로 성장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기본’이다. 누구나 기본만 가주고 있으면 세속적인 일에서나 영적인 일에서나 모든 일을 잘 이룰 수 있다. 기본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기본 가운데 기본인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는 것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이외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고독한 상태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 자신의 존재적 목적을 찾기만 하면 나머지 모든 일이 가능해진다.
기능적인 잠깐의 이익을 거부하고 본질을 선택하는 태도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는 수치심, 즉 부끄러움을 알아야만 발휘된다. 『관자』에 국가의 기틀 네 가지, 즉 ‘예禮, 의義, 염廉, 치恥’라는 사유四維를 제시한다. 그중에서도 수치심은 정의를 실현하는 기둥이다. 사회에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는 자기 반성력이 사라지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려 파멸을 면치 못한다. 수치심이라 불리는 염치가 사라지면 파렴치한 사회가 된다. 인간다워지려면 염치를 알면 된다. 최소한 부끄러워 할 줄만 알아도 한 층 더 높게 오를 수 있다.
책 소개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최진석 지음. 2021.05.03. (주)북루덴스. 293쪽. 17,000원.
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베이징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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