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
이 책의 부제목은 「인생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
조용헌의 칼럼은 조선일보에서 즐겨보던 코너이다. 저자는 내공을 기르는 방법은 첫 번째 독서, ‘독만권서讀萬卷書’이다. 두 번째 방법은 ‘행만리로行萬里路’이다. 만권의 책을 읽는 것과 여행을 하는 것이 내공을 기르는 방법이라고 한다.
내공이 축적된 최고의 경지는 ‘샬롬’이다. 기독교에서 하는 말이다. 내면의 평화를 말한다. 존재 자체로 내면세계가 평화로운 사람, 즉 샬롬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다. 샬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신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 신은 은총은 무조건 쉽게 받는 것이 아니다. 시련을 겪어야 한다. 시련 없이는 샬롬에 도달할 수 없다. 그 시련은 4대 과목을 이수해야 한다. 감방, 부도, 이혼, 암癌이다.
감방살이하면서 육체적인 자유를 구속당해 보고, 콩밥도 먹어 보는 일이 감방살이다. 부도, 이것도 간단하지 않다. 주변 사람들의 돈을 떼어먹고 갚지 못하는 일이다. 그 주변의 시선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길바닥에 나앉는 사태를 감당하는 일이 쉬운 일인가! 경제적 파탄 상태에 도달해서 최후로 길바닥에 내몰렸을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혼과 암도 마찬가지이다. 이 4대 과목의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 내공이 쌓인다. 이 고난을 뚫고 죽지 않았으면 그 사람은 내공의 고단자다. 피, 땀, 눈물. 이 3가지 액체를 바가지로 흘리면서 우리 인생은 내공을 쌓는다. 쌓고 싶지 않아도 ‘자동빵’으로 쌓인다. 이 책은 천하를 주유하면서 저자의 내공이 쌓인 내용을 함축한 것이다. 공감하는 몇 가지 문구를 정리했다.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서 시속 300km 속도로 굴러갔을 때 비로소 육중한 비행기 몸체가 뜬다. 삶의 활주로에서 300km 속도까지는 죽어라 굴러 보아야 부력이 생긴다. 그전까지 대강 살아서는 부력이 안 생긴가. 죽을병이나 교통사고 같은 절체절명의 상태에까지 가 보아야 부력이 생긴다. 인생이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생기는 힘이 부력이다. 아니면 신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깊은 신앙심도 해당한다.
정치는 누드 게임이다. 하나하나 옷을 벗길 때마다 대중은 환호한다. 모든 사람은 누드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누드로 가는 길에는 사생활도 없고, 가정사도 없다. 8할을 넘어가면 포르노배우가 되는 길이다. 그런데도 왜 인간은 꼭대기를 향해서 달려갈까. 누드가 되어도 좋다는 각오 없이 말이다. 각오와 준비 없이 얼떨결에 8할을 넘었다가 근래에 패가망신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벼슬에 대한 집착은 유교 문화의 유산인가. 아니면 인간 본성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정 욕구’의 발동인가. 현재 한국 사회는 모든 위선과 거짓을 해체하는 도살장이다. 8부 능선 아래에서 멈추는 ‘지지知止’의 경지는 어렵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의 대선 후보 중 하나는 부끄러움도 없는 안하무인이다. 위선과 거짓이 당연한 것으로 안다. 전 국민에게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다.
‘속을 비우고 굶어 죽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결한 죽음이요, 성스러운 죽음이다.’ 몇 년 전 인도의 자이나교 전문가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불교와 비슷한 시기에 인도의 성자 마하비라에 의해 창시된 자이나교. 이 종교의 방법론은 금욕이 특징이다. 고행을 통해서 본래의 영혼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행의 대표적인 방법이 단식이다. ‘음식남녀’가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라고 한다면 남녀 관계에 대한 욕구보다 더 근원적인 욕구가 음싱에 대한 욕구이다. 섹스를 안 한다고 죽는 것은 아니지만 먹지 않으면 죽는다.
자이나교에서 하는 이야기는 인간은 먹기 위해서 자기 배 속에 음식을 집어넣기 위해서 온갖 ‘업業’을 쌓는다는 것이다. 사기 치고 뒤통수 때리고 배신하고 강탈하고, 이 모든 부도덕한 행위가 따지고 보면 먹자고 하는 짓이다. 인간 삶은 동물의 왕국이다. 따라서 음식을 안 먹고 속을 비워서 죽는다는 것은 이 모든 카르마로부터 벗어 나는 수행이 되는 셈이다.
가상화폐는 휴대폰 화면이나 컴퓨터 화면에서만 보이는 돈이다. 화면에 숫자로만 존재한다. 화면의 숫자. 이것이 가상이다. 그런데 이 가상의 돈이 실체다. 화면에 숫자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돈이다. 손으로 만져볼 수 없는 돈이다.
황금은 금속이다. 손으로 만져보면 묵직한 느낌이 든다. 돈은 묵직한 느낌이 들어야 맞다. 이것이 지폐로 변했다. 황금에 비해서 실체감이 훨씬 떨어지지만, 지폐도 손맛은 있다. 그러나 가상화폐는 장롱에다가 넣어 둘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다. 냄새도 맡아 볼 수 없다. 오로지 화면에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화면상에서만 명멸하는 것이다. 공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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