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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서조 Jun 02. 2022

정혜신 저 ‘당신이 옳다.’를 읽고

관계의 개선을 위한 공감과 심리적 이해

이 책은 ‘책 읽는 사람들 재단’ 지원으로 사서 읽게 됐다.

인터넷 추천도서를 검색하다가 선정했다.


명색이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하지만 실전 경험이 없는 나에게 이 책이 주는 느낌은 현장감으로 다가왔다. 평소 가정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사례들을 읽으면서 “아~ 내가 그때 식구들에게 말을 잘 못 했구나!”라는 반성하게 되는 대목이 있었다. 여러 번 읽어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전반적인 느낌은 저자가 만능 해결사인 것 같이 비치는 것이 아쉬웠다. 모든 사례와 같이 세상에 심리적인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쉽게 해결 된다면 어려울 것이 없을 것 같다. 는 느낌을 주는 것은 좀 위험한 것 같다.     


모두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세상 이치인데 이 책에서 모든 문제는 “공감”으로 다 해결된다. 이런 접근은 과도한 희망 사항.

실패한 상담 사례도 책에 실렸으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아쉬운 점이 있지만, 현대인은 약간의 심리적 불안이나 질환이 있는 것이 현실인 점을 감안할 때 한 번쯤 읽어두면 삶이 좀 더 여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름다운 사회를 위해 책을 낸 저자와 책이 나올 수 있게 외조를 한 남편 이명수 씨에게 감사드린다.      


1장 왜 우리는 아픈가.

자기 방식으로 나를 표현했을 뿐인데 대중의 폭발적인 환호와 관심을 받아 스타가 되는 이도 있다.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이고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원래 그런 것뿐인데 독특하다고 주목받으며 인기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나’가 흐려지면 사람은 반드시 병든다.

공황발작은 자기 소멸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버둥거리며 보내는 모르스 부호 같은 急電이다.      


사람은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에게 끌린다. 사람이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거침없이 나를 표현할 때다. 모든 아기가 아름다운 것도 그 때문이다.

누구든 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해진다.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사람은 자기에게 공감해 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 사람은 본래 그런 존재다.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그것은 확실한 ‘내 편 인증’이다.

이것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이다.

그런 마음이 들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그러니 당신 마음은 옳다고. 다른 말은 모두 그 말 이후에 해야 마땅하다. 그게 제대로 된 순서다.

사람 마음을 대하는 예의이기도 하다. “당신이 옳다.”     


감정은 존재의 핵심이다.

내 가치관이나 신념, 견해라는 것은 내 부모의 가치관이나 책에서 본 신념, 내 스승의 견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가정은 오로지 ‘나’다.

그래서 감정이 소거된 존재는 나가 아니다. 희로애락이 차단된 삶이란 이미 나에게서 많이 멀어진 삶이다.     


2장 심리적 CPR-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

내가 맨몸이었을 때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극진히 보살펴 준 사람은 뼛속에 각인된다.

내 존재 자체에 반응한 사람이니 그 사람만이 내 살에 의미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런 사람을 만나야만 존재의 근원적인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존재의 근원적 불안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래야 살아갈 힘의 최소한의 안정 기반을 만들 수 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나 집중을 받는 경험이 적으니 사람들은 아플 수밖에 없다.      

죽음은 수많은 삶의 사연 곁에 늘 함께 있다.

사연으로 가득한 그 개인들의 복잡한 상황과 갈등 곁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 죽음이다. 무엇을 묻느냐가 아니고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치유이기 때문이다.     


감정도 그렇다.

슬픔이나 무기력, 외로움 같은 감정도 날씨와 비슷하다. 감정은 병의 증상이 아니라 내 삶이나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인간의 삶은 죽음이라는 벽, 하루는 24시간뿐이라는 시간의 절대적 한계라는 벽 앞에 있다.

인간의 삶은 벽 그 자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우울한 존재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감정들은 삶의 나침반이다. 약으로 함부로 없앨 하찮은 것이 아니다.

약으로 무조건 눌러버리면 내 삶의 나침반과 등대도 함께 사라진다. 감정은 내 존재의 핵이다.     


이해관계없이도 무조건 나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는 가족 같은 관계, 최소한 나를 의식이라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존재가 소멸된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빠르게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는 방법이 폭력이다.

폭력은 자기 존재감을 극대화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누군가에게 폭력적 존재가 되는 순간 사람은 상대의 극단적인 두려움 속에서 자기 존재감이 폭발적으로 중폭 하는 걸 느낀다.     


내 상처의 내용보다 내 상처에 대한 내 태도와 느낌이 내 존재의 이야기다. 내 상처가 ‘나’가 이니라 내 상처에 대한 내 느낌과 태도가 더 ‘나’라는 말이다.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한다면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자연히 떠오른다.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존재에 주목하고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존재를 그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 요인이다.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3장, 공감     

사람의 속마음은 무의식적 욕구나 욕망뿐 아니라 살아오며 겪었던 상처와 그 감정들,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오래된 기억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는 캄캄한 곳이다.     

감자는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다. 너도 마음이 있지만 나도 마음이 있다는 점, 너와 나는 동시에 존중받고 공감받아야 마땅한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힘도 공감적 관계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관계를 끊는 것이 너와 나를 동시에 보호하는 불가피한 선택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4장, 경계 세우기-나와 너를 동시에 보호해야 공감이다.

경계가 무너지면 많은 것을 희생하고도 오히려 비난과 공격을 더 받게 된다. 부모 자식 간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있다. 배우자나 연인, 친구 사이에서도 흔한 일이다. ‘헌신성’이란 덕목은 의외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쉽게, 소리 없이 허문다.


그 어떤 관계도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관계의 목적일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이 부모 자식의 관계라도 마찬가지다.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 관계가 기쁨과 즐거움이거나 배움과 성숙, 성찰의 기회일 때다. 그것이 관계의 본질이다. 끊임없는 자기 학대와 자기혐오로 채워진 관계에서 배움과 성숙은 불가능하다. 그 관계는 끊어야 한다.     


5장, 공감의 허들 넘기-진정한 치유를 가로막는 방해물

사랑 욕구는 아기 때부터 시작해서 늙어서 숨이 멎기 직전까지 인간이 한결같이 갈망하는 것이다.

사랑 욕구가 일생동안 쉬지 않고 안정적으로 채워져야 피폐해지지 않고 살 수 있다. 마음은 사랑 욕구가 채워져야 움직인다.

사랑과 인정 없이는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     


사랑을 갈구하는 대상은 나이가 들면서 부모에서 학교 선생님으로, 친구나 이성 친구에서 배우자와 상사로 옮겨간다. 더 늙으면 자식이나 후배에게 사랑받길 원하기도 한다. 대상은 나이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지만 욕구 자체는 변치 않는다.

결핍이 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조건과 상황 때문에 욕구는 더 절박하고 강렬해진다. 충족된 욕구는 더 이상 욕구가 아니므로 충분히 사랑받은 사람은 그 요구에 휘둘리지 않고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일수록 공감에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람은 더 많이 오해하고 실망하고 그렇게 서로를 상처투성이로 만든다. 서로에 대한 정서적 욕구, 욕망이 더 많아서 그렇다.

그래서 배우자나 가족에겐 너그럽기가 더 어렵다. 서로에게 받을 것이 있다고 믿는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깊이 수용하고 공감하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가족이나 연인이 가장 원망스럽고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되는 이유다.     


융통성 넘치고 너그럽다가도 어떤 일에는 심하게 열을 받는다, 옆에서 보기에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어떤 지점에서 황소고집을 부리기도 한다.(내 안에 남아 있는 콤플렉스)     


사람은 자기가 안전하다고 느껴야 지신이 놓인 상황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공감에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 사람은 믿어도 되는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일한 역할이 그것이다.     

내가 선택했어도 열 번 백 번 무를 수 있고 바꿀 수 있다. 바꿔도 되는 공인 횟수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르다. 그걸 인정해 줘야 한다. 바꿔도 된다는 충분한 인정을 받은 사람이 가장 빠르고 안정적으로 자기의 최종 선택지에 닿는다.     


아들이 가벼워졌는지 궁금하면 다시 물어보면 된다. 눈치 볼 필요 없다. 물어봐 주는 것 자체가 치료적 손길이다. 자기에게 사과한 엄마가 자신의 반응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아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포근하겠는가.     


아무리 훌륭한 말이어도 일방적인 계몽과 교훈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듣는 이에게 강박 관념으로 남거나 상처만 주고 튕겨 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그저 겉보기에 좋은 말일뿐이다. 사람은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를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     


기능적 역할에 충실한 관계라면 부부보다는 조직원이나 동료에 가까운 관계다. 사랑해서 만났어도 서로의 개별성에 다다르는 과정을 생략하다 보면 기능적 역할에 충실한 관계에 머물게 된다. 역할에 충실한 관계란 집단 사고에 충실한 삶이다. 역할 놀이 중인 삶이다. 이런 삶, 이런 관계 속에서 상대가 누군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면서 한 번도 그의 속살을 본 적이 없는 삶이다. 평생을 살아도 그가 누구인지 모를 수밖에 없는 삶이다.     


삶에는 변수가 많지만 최소한의 상수가 존재해야 한다.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면 사는 우리 삶에서 그 상수 중 하나가 사람에 대한 나름의 내적 평가 틀이다.     

공감은 들어주는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외형적 무엇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6장 공감 실전-어떻게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공감은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감정적 교류다. 잘 모를 때는 아는 척 끄덕끄덕하지 말고 더 물어야 한다. 이해되지 않는 걸 수용하고 공감하려 애쓰는 건 공감에 대한 강박이지 공감이 아니다. 에너지 소모만 엄청나다. 그렇게 계속 버티기는 어렵다.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무슨 수로 공감하나. 궁금해야 질문이 나온다. 궁금하려면 내가 내린 진단과 판단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의 틈이 있어야 한다.   

  

관계란 것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홀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다. 내가 전부가 아닌, 나도 있고 너도 있는 판이기 때문이다. 결론을 이미 갖고 있던 그녀가 고심 끝에 던진 질문들은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라기보다 자기 결론을 은연중에 전달하려는 의도가 감긴 ‘질문 형식의 조언이나 계몽’이었다.     


공감은 내 생각, 내 마음도 있지만, 상대의 생각과 마음도 있다는 전제하에 시작한다. 상대방이 깊숙이 있는 자기 마음을 꺼내기 전엔 그의 생각과 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관계의 시작이고 공감의 바탕이다.     


모든 인간은 각각 개별적 존재, 모두가 서로 다른 유일한 존재들이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같은 감정을 갖지 않는다. 다르다. 그러므로 공감한다는 것은 네가 느끼는 것을 부정하거나 있을 수 없는 일, 비합리적인 일이라고 함부로 규정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는 것이다. 관심을 갖고 그의 속마음을 알 때까지 끝까지 집중해서 물어봐 주고 끝까지 이해하려는 태도 그 자체다. 그것이 공감적 태도다. 공감적 태도가 공감이다. 그 태도는 상대방을 안전하게 느끼게 하고 믿게 하고 자기 마음을 더 열게 만든다.     


공감을 잘하기 위해서 어떤 질문을 하는 게 좋을까 좋은 질문은 아이의 대답에 집중하고 궁금해하는 태도가 어떤 좋은 질문보다 더 좋다.

그 태도가 더 공감적이고 치유적이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     


날씨는 하루하루의 바람과 습도, 주변의 기압 등 주변 모든 상태와의 상호 작용을 거치며 계속 달라진다. 사람 마음도 그렇다. 한순간도 고정되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달라진다. 치유를 경험한 마음은 성장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에필로그

큰일을 결정하기 전에 우리는 농반진반으로 프로스트의 시를 인용하며 둘의 역할을 정한다.

“비가 바람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밀어붙여 나는 퍼부을 테니’ -로버트 프로스트 「쓰러져있다」 중     


공감이 그렇다. 옴짝달싹할 수 없을 것처럼 숨 막히는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공감이 몸에 밴 사람은 순식간에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없는 것 같던 공간이 순식간에 눈앞에 펼쳐진다. 사람들 마음속에서 공감이 하는 일이다. 사람은 그렇게 해서 사지를 빠져나올 수 있다. 공감의 힘이다.     


당신이 옳다. 정혜신 저, 2018.10.10. ㈜해냄출판사. 15,800원.  


정혜신 – 30년간 정신과 의사로 활동. 2014년 아소카 펠로로 선정. 저서 [당신으로 충분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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