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물음의 끝에서 마주한 천년의 지혜」
이 책의 부제목은 「삶이라는 물음의 끝에서 마주한 천년의 지혜」이다. 제목에 끌려서 읽었다.
인생의 마지막 질문은 무엇일까? 나에게 물어봤다. 답을 알 수 없었다. 아직 마지막에 대한 느낌을 못 느꼈기 때문에.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삶이 다하는 순간을 말하는 것, 즉 죽음에 다다른 상태를 말한다. 죽음에 다다라서 무엇을 물어보게 될까? 아마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끝이 나는 것일까?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 등이 궁금해질까? 죽어가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도 의문이다. 숨쉬기 급박한 상태일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을까? 저자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먹어야 산다면 잘 먹어야 하고, 또한 잘 먹었으면 잘 싸야 한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밥을 먹으면 식도를 통해 위로 들어가고 소장과 대장을 각종 소화기관을 거쳐 항문으로 변이 나온다. 밥이 똥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밥이고 어디서부터 똥인가?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밥과 똥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다. 밥과 똥이 한 줄로 이어져 있는 우리 몸인 ‘한 통 속’에서 밥과 똥은 확연하게 갈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몸 안에 똥을 담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서 말도 하고 사랑도 하고 밥도 먹는다. 거룩하게 기도를 드릴 때나 성행위를 할 때도 여전히 우리 몸 안에는 얼마간의 똥이 들어 있다. 산다는 것은, 밥과 똥의 타협 과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뭐 그리 깨끗하고 고상한 척 위선 떨 일이 아니다.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한다. “돌아보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돌아본다는 것에 대해, 잠시 멈투고 돌아본다고 해서 무언가 대단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 삶에서 알고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삶에서 비교도 안 되는 더 길고 긴 시간을 우리는 그저 모르고 살아간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르는 것은 물론 살아왔던 삶이라고 해서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나온 세월을 지금 돌이킨다고 해서 몰랐던 것을 알게 다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삶에서 앎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삶에 대해 꽤 많이 아는 듯이 착각하니 더욱 힘들어 진다. 라고 말한다.
이 책은 네 가닥으로 되어 있다. 첫째, 태어나고 이내 소멸하는 삶의 원리를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둘째,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내뻗는 몸짓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본다. 셋째, 삶의 지혜를 더듬는 ‘길’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삶이 바라고 비는 몸짓과 마음 씀에 대해 새겨본다. 제목과 내용이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책에서 공감이 가거나 기억하고 싶은 글귀를 적었다.
《구약성서》 〈전도서〉 3장에 있는 문장을 인용한다.
[무엇이나 때가 있다]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으면 살릴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통곡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다. 연장을 쓸 때가 있으면 써서 안 될 때가 있고 서로 껴안을 때가 있으면 그만둘 때가 있다. 모아 들일 때가 있으면 없앨 때가 있고 건사할 때가 있으면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으면 꿰맬 때가 있고 입을 열 때가 있으면 입을 다물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싸움이 일어난 때가 있으면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결국 좋은 것은 살아 있는 동안 잘 살며 즐기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낼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선물이다.
무슨 일이 일어도 그 일은 전에 있던 일이요, 앞으로 있을 어떤 일도 전에 있던 일이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마냥 그 일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란 본디가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밝히보연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운명은 짐승의 운명과 다를 바 없어 사람도 짐승도 같은 숨을 쉬다가 같은 죽음을 당하는 것을! 이렇게 모든 것은 헛되기만 한데 사람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무엇인가! 다 같은 데로 가는 것을! 다 티끌에서 왔다가 티끌로 돌아가는 것을!… 그러니 제 손으로 수고해 얻은 것을 즐기는 것밖에 좋은 일이 없다. 그것이 사람마다 누릴 몫이다. 죽은 다음에 어찌 될지 알려 줄 자 어디 있는가!
편견에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하나는 ‘무지의 결과’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주 강하다’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무지’와 ‘최강’은 언뜻 보면 모순된 특성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단호하게 주장하거나 강하게 내세울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편견이 강한 힘을 ㅂ라휘할 수 있는 이유는그것이 바로 ‘무지’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무지와 최강은 전혀 다른 특성으로 보이지만 이 둘은 사람 안에 함께 얽혀 있다. 쉽게 말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생성과 소멸의 순환 가운데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순환 운동의 지극히 짧은 순간만을 살다가 가는 우리는 그것이 전부인 줄로 착각한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지야말로 최강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자기가 알 수 있는 것만 존중한다는 것이고, 이는 사실 자신만을 존중하는 것에 불과하다. 편견은 자가당착에 빠지게 할뿐 아니라 생성 소멸의 순환을 살아내기 어렵게 만든다.
사랑과 미움이 함께 공존하거나 서로 뒤바뀌기도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 둘을 관통하는 ‘관심’ 때문이다. 사랑도 관심이고 미움도 관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립적이지만 공존하기도 하고 교차하기도 한다. 관심이 관건이다. 관심이 삶을 결정한다. 삶의 목적으로 행복을 말하지만, 행복도 관심에 따라 그 내용은 서로 다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할 때 그 기준은 여러 가지이더라도 거슬러 올라가자면 결국 관심이다. 관심과 정반대로 무관심이 있다. 관심이 재미나 이익과 관련된다면 무관심은 재미도 없고 이익도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리킨다. 지나친 관심이 피로를 낳을 수도 있지만 무관심은 맹목이다. 보지 않을뿐더러 보이지도 않는다. 관심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살이 있던 것이 스러져 갈 때는 썩어서 분해되거나 마르면서 남게 되거나 한다. 이 차이는 공교롭게도 ‘물기’때문이다. 물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것들에게는 썩어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물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들을 뭉치게 하는가 하면 동시에 녹여 흩뜨려 버리기도 한다. 응집력과 용해력이라는 상반된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우리는 죽음을 먹으면서 살아왔기에 또한 죽음으로써 새 삶의 먹이가 된다. 나를 살고 있는 생명이 ‘태어난生 목숨命’일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삶生이 명령命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형도, 〈노을〉 시에서 어느 경우든 간에 우리는 모두 노을에 이른다. 아니 노을이 우리에게 밀려 들어온다. 도망칠 수도 없다. 그때 서야 흘러온 시간이 참으로 무섭게 느껴진다. 지나가 버린 과거다. 신도 되돌아가지 못한다는 과거다. 어둠이 깔리고 땅거미가 밀려오는 소각장으로 내몰리면서 돌이켜보게 되는 과거다. 노을은 밤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이다. 가장 길어졌던 그림자가 바로 없어진다. 그래서 노을은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가장 무섭다.
지식은 ‘앎’이고 지혜는 ‘삶’이다. 지식은 앎을 늘림으로써 모름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름은 불편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더 많은 지식을 갖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그런 지식은 가질 수 있고 모을 수 있다. 더 많이 알고 가지면 더 안정감을 느끼고 더 유리하고 편리하다.
지혜는 삶이라고 했다. 앎은 모름을 줄이고 없애는 것이 목표이지만 삶은 모르고도 살고 살고도 모른다. 삶에서 모름을 없앨 수는 없다. 무엇을 얼마나 모르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모름과 관계하는 것이 삶의 길이고 지혜다.
세네카는 “시간은 우리에게 삶을 주지만, 또 우리의 삶을 빼앗아 가기도 한다”라고 했다. 우리 삶은 새오룬 시간인 미래로 나아가지만 또한 미래는 현재를 거쳐 이내 과거로 사라져가면서 우리 삶을 빼앗아 가기도 한다. 문제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삶이 그저 새로운 시간으로 계속해서 나아갈 것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다.
시간은 희망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절망이기 때문이다. 희비극의 교차가 우리의 운명이다. 시간은 흐르면서 생성했던 것을 소멸시키니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는 점에서 절망이다. 그러나 시간은 또한 영원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움을 창조한다. 시간의 흐름으로 보아도 과거나 미래가 그 자체로 있지는 않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기대한다. 현재하고 있는 기억을 통해 과거는 현재로 들어오고, 현재하고 있는 기대를 통해 미래가 현재로 들어온다. 따라서 이어진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로 밀고 들어온다. 영원이 시간으로 들어오는 절묘한 방법이다.
우리는 살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보다 확실하고 멋진 자신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정체성 identity이란 변화무쌍한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유지되는 동일성 identity을 뿌리로 하고 있다. 영어표기가 같은 것도 직접적으로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같음과 옳음을 하나로 묶어 ‘무오한 자기 정체성’을 주장한다. 자기를 엄격하게 점검하는 도덕주의가 이를 입증하는 좋은 사례다. 남들에게 흠결이 없게 보이도록 노력하는 도덕주의가 오히려 자신을 억압하는 모순이 될 수 있다.
〈결혼에 대하여〉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도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소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칼릴 지브란,
책을 읽고 글귀와 내용을 내 생각과 주장에 맞는지 살펴보는 것도 독서의 한 방법이다. 이 책은 그런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책 소개
『인생의 마지막 질문』 정재현 지음. 2020.07.29. 청림출판(주). 341쪽. 16,000원.
정재현. 연세대학교 철학과. 문학사 전공. 미국 Emory University 일반대학원 종교학부 박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종교철학 전공 교수. 한국종교철학회 회장. 저서 『티끝만도 못한 주제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