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빌딩들이 하나둘씩 앞다투어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와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건물들은 도시의 하늘을 가르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오래된 한옥 지붕과 골목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도심에는 최고층 빌딩이 세워졌다며 연일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거리에는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출근길을 서두르는 직장인들이 눈에 띄었다. 골목에서는 어깨에 물건을 이고 나르는 상인들과 물건을 들고 흥정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시장을 이루었다.
도심과 주택가 그 어디쯤 위치한 낡은 전당포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봄내음 냄새가 문틈으로 밀려들어왔고, 한 손으로 문을 잡아 열며 남학생이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160cm 중반의 키에 앳돼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엔 어른들에게서만 풍길 법한 무게감이 깃들어 있었다. 표정과 상반되게 교복은 군데군데 해져 있었고, 소매 끝은 해진 실밥이 드러나 있었다. 허름한 가방은 낡은 가죽끈으로 간신히 메워져 있었고, 신발의 코 부분도 닳아 있었다.
그는 주변을 잠시 살피는 듯하더니, 카운터 뒤에 앉아 있는 전당포 주인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 안녕하세요.
어깨를 쭉 펴고 서 있는 모습은 그의 낡은 옷차림과 대조적으로 단단하고 굳건해 보였다.
전당포 주인은 신문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고 물었다.
- 학생인 것 같은데 여긴 무슨 일로?
남학생은 표정변화 없이 말했다.
- 네, 돈 좀 빌리려고요.
돈을 빌린다는 말에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학생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 돈을 빌린다고? 얼마나?
남학생은 가볍게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 삼... 삼십만 원요
자신감 있게 말하던 그였지만 금액을 말할 때만큼은 잠시 움츠러들었다.
주인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학생을 계속 살폈다.
자신이 부른 금액이 너무 큰 건 아닌지 고민하는 와중에 주인이 아무 말이 없자 학생이 먼저 말을 꺼냈다.
- 안되면.. 이십만 원 만이라도 빌려주세요.
주인은 그제야 물었다.
- 돈은 어디다 쓰려고?
남학생은 당돌하게 반문했다.
- 어디에 쓰는지 얘기해야 하나요?
주인은 웃으며 얘기했다.
- 너 은행에서 돈 안 빌려봤지? 돈을 쓰는 목적을 얘기해야 빌려주는 거야.
남학생은 잠시 머뭇했다. 잘 못 말하면 돈을 안 빌려줄까 봐 고민하는 듯했다.
- 이상한데 쓰는 거 아니에요. 그냥... 잠깐 돈이 없어서 빌리는 거고 곧 갚을 거란 말이에요.
전당포주인은 입을 오므리며 잠깐 앞으로 내밀었다가 이내 말했다.
-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전당포니까 뭘 맡길진 정하고 왔겠지?
- 네... 이거...
학생은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오래된 손목시계였다. 금빛이 바래고 몇 군데 긁힌 흔적이 있었지만, 시계를 쥔 그의 손길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 시계네?
- 네...
- 그런데 어쩌지? 우리는 이런 거 취급 안 하는데
- 네? 이거 좋은 거예요. 엄청 아끼던 거란 말이에요.
전당포주인은 씩 웃으며 마치 큰 자랑거리인양 강조하며 말했다.
- 음... 우리는 이런 물건은 취급 안 하고 약속을 맡기면 돈을 빌려주지. 들어올 때 간판 못 봤어? 약속전당포라고 딱 붙어 있는데.
- 약속이요?...
학생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시계를 가방 안에 넣으며 돌아섰다.
- 어디 가려고?
- 다른 전당포에 가보려고요.
- 아니 아니. 약속을 맡기면 된다니까.
- 약속을 맡긴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 말 그대로 너한테 중요한 약속을 전당포에 맡기면 그걸 담보로 돈을 빌려준다고. 살면서 약속 같은 거 안 해봤어?
학생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 그럼 제가 이 돈을 꼭 갚겠다는 약속을 할게요.
- 야! 돈은 당연히 갚아야지. 그건 나랑 계약할 때 하는 계약내용이고. 너가 계획한 거. 뭔가 꼭 하려고 하는 거 그런 거 없어?
학생은 고개를 살짝 틀어 천장을 보며 고민을 하는 듯했다. 잠시 후 긴 한숨을 쉬더니 뭔가 결심한 듯 얘기했다.
- 그럼... 학교를 그만 다닌다는 약속을 할게요.
- 학교를 그만둔다고?
- 네. 원래 그만 다닐 계획이었고 실제로 그만두면 약속을 지키는 거잖아요.
- 너가 학교를 그만두면 뭐가 달라지는데?
- 빨리 돈 벌어서 빌린 돈 갚는 거죠.
- 넌 내가 하는 말이 잘 이해가 안 되는구나.
전당포주인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사무실 안을 한 바퀴 돌았다.
- 알았어. 그럼 이렇게 하지. 고등학교까지 졸업한다는 약속을 하고. 그걸 담보로 돈을 빌려주마.
학생은 생각지 못한 전당포주인의 말에 당황하며 물었다.
- 네? 그럼 제가 돈을 어떻게 갚아요?
- 졸업하고 갚아. 대신 중간중간 내가 시킨 심부름이나 좀 하고. 아무리 공부가 싫어도 학교는 끝까지 다녀야 지. 계약해줄테니 이름부터 말해봐.
- 기... 필준이요.
계약 후 1주가 채 안되었을 때 학생이 다시 전당포에 찾아왔다.
- 아저씨, 학교 좀 와주실 수 있나요?
- 야! 나 아저씨 아니야. 학교는 왜?
- 보호자랑 같이 오라고...
- 근데 왜 내가 가?
- 그냥... 생각나는 사람이 아저씨밖에 없어서요...
- 아저씨 아니라니까!
[ㅇㅇ 중학교]
- 야! 너희 엄마 ㅇㅇ라며?
햇살이 교실 창문을 통해 환하게 들어오고 있었지만, 안의 공기만큼은 무겁고 팽팽했다. 점심시간. 기필준은 자신의 책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가 손으로 연필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교실 뒤쪽에서 들려오는 키득거림과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그의 귀를 찔렀다.
- 야, 걔 엄마 그거 알지? 동네에서 유명하다며?
- 맞아. 재수 없어
기필준의 손이 멈췄다. 그러나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뒤쪽에서 이어지는 말들은 마치 일부러 들으라는 듯 점점 커져왔다.
- 야, 너희 엄마 얘긴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진짜 맞는 얘기라 그런 거냐?
기필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책상을 발끝으로 툭 차며 비웃었다.
-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거 보니 인정하는 거네? 하긴 뻔하지 뭐
기필준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 그만해.
기필준이 낮은 음색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의 말을 비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 뭐라고? 다시 말해 봐. 안 그만두면 니가 날 어떻게 할 건데?
그 순간 기필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상대의 멱살을 붙잡았다. 눈에는 이성이 사라지고 억눌려 있던 분노가 폭발하듯 번뜩였다.
- 한 번만 더 엄마 얘기하면 나도 더 이상 안 참아.
상대 학생은 어쭈하는 표정으로 비아냥대며 얘기했다.
- 니 엄마 ㅇㅇ...
순간 기필준의 주먹이 상대의 얼굴을 향했다.
얼굴을 가격 당한 그는 책상 쪽으로 쓰러지며 주변에 소리쳤다.
- 야! 이 새끼가 나 쳤잖아. 뭐 하고 있어.
주변 아이들이 기필준에게 몰려들었지만 기필준은 상대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으며 그를 놓지 않았다. 마치 미친개처럼.
저녁이 되어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번지는 골목. 전당포 주인은 기필준과 함께 느릿한 발걸음으로 한 집 앞에 멈춰 섰다. 기필준은 전당포 주인의 옆에 서 있었지만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당포 주인은 잠시 그 집을 올려다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들어가 보자.
기필준은 아무 말 없이 여전히 굳어 얼굴로 서 있었다.
둘은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몇 초 후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나왔다. 여자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졌다.
- 무슨 일이시죠?
전당포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 안녕하세요. 저지른 잘못을 사죄드리러 왔습니다.
여자는 말없이 주인과 기필준을 살펴보았다.
전당포주인은 재차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우리 필준이가 감정에 휩쓸려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 때문에 얼마나 속상하셨을지 제가 다 헤아리진 못하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여자는 팔짱을 낀 채 헛웃음을 켰다.
- 아... 우리 아들 저 꼴로 만든 작자들이구만. 무슨 염치로 집까지 찾아왔데.
전당포 주인은 그녀의 말에 바로 무릎을 꿇었고 기필준은 전당포 주인의 갑작스런 행동에 깜짝 놀란 듯 했다.
팔짱을 끼고 서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가 드러났다.
- 이게 사과한다고 될 일이에요? 애를 어떻게 저지경으로 만들어놨어! 그 어미에 그 아들이라더니.
순간 기필준이 움찔하는 것을 본 전당포 주인은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어 여자에게 말했다.
- 이 아이가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오늘 일을 계기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제가 끝까지 책임지고 가르치겠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어머니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 됐어요. 절대 용서는 없어요. 절차대로 처리할 거니까 돌아가세요. 우리 애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전당포 주인은 외투 안주머니에서 봉투하나를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 이... 게 뭐예요?
- 아주 약소하지만 아드님 치료비 등 생각해서 준비해 보았습니다.
여자는 콧방귀를 뀌며 한 손으로 봉투를 받아 안을 슬쩍 살펴보았다. 대충 봐도 꽤 큰 금액이었다.
그때 안쪽에서 피해학생이 입안에 음식을 가득 물고 밖으로 나왔다.
- 엄마! 밥 더 달라니까 왜 안 줘. 어!! 저 새끼 왜 왔어!
기필준 옆의 무릎 꿇은 남자를 보고 학생은 소리를 더 크게 질렀다.
- 저 새끼 절대 봐주면 안 돼. 퇴학시켜야 돼 엄마. 이번학기 내 성적...
순간 여자가 소리를 빽 질렀다.
- 조용!! 빨리 들어가!
여자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전당포주인에게 말했다.
- 이딴 돈으로 우리 애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에요. 그냥 옆에 이 학생이 불쌍해서 한번 봐주는 거예요.
여자는 봉투를 팔짱 안쪽으로 슬며시 챙기며 문을 닫고 돌아섰다.
전당포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털며 물었다.
평소와 달리 표정에 매서움이 서려있었다.
- 너... 남들 공부 방해하고 그러는 거야?
- 공부 방해요?
기필준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 쟤 성적이 어쨌다는 건데?
-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전당포 주인은 음성을 한 톤 높여 물었다.
- 상관없긴 뭐가 없어. 너 퇴학하기만을 바라는 것 같던데.
기필준은 뒤 돌아가며 말했다.
- 몰라요. 왜 저한테 그걸 따지는지. 제가 없으면 등수가 올라가나 보죠 뭐.
- 꼴등끼리 키재기 하냐?
기필준은 뛰기 시작하며 뒤돌아 전당포주인에게 소리쳤다.
- 제가 1등이에요.
멀리 뛰어가는 기필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전당포주인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