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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2)

by 공부남주

*** 1983년 전당포


낡은 문이 덜컥 열리며 한 남자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두 손을 비비며 들어왔다.

서글서글한 표정의 남자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발로 문을 닫았다.

- 뭔 놈의 사무실이 바깥보다 더 추워.

난로 옆 작은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 가 불렀네. 눈비만 막아줘도 감지덕지해야지.


사무실로 들어온 남자는 난로 위 주전자 두 손을 바짝 붙이며 말을 이었다.

- 사무실 개업했다길래 기대했더니만. 다 쓰러져 가는 사무실이네.

- 왜? 부러워?

전당포 남자는 따듯한 물이 든 컵을 상대에게 건네며 피식 웃었다.


- 부럽긴 개뿔. 넌 머리는 좋은데 멍청하단 말이야. 뭔 놈의 약속을 맡고 돈을 빌려준다는 거야. 그런 사업이 가당키나 해? 겨울이라 파리는 안 날릴 것 같긴 하다만 사기당하기 딱 좋은 아이템이야.

남자는 난로 앞쪽 자리에 앉으며 빈정거렸다.


전당포 남자는 주전자에서 물을 한 잔 더 따르며 말했다.

- 소중한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릴 정도로 간절한 사람들한테 이것 만큼 부담 없는 담보가 어디 있다고 그래? 부러우면 부럽다고 솔직히 말해. 이미 첫 고객도 계약을 했어.


남자는 컵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손을 녹이다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 뭐? 아니.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계약을 한다는 거야?

- 말 조심해. 나이는 어리지만 우리보다 어른이라고. 아이가 있는 여고객이 약속전당포 영광의 첫 고객이란 말씀.


상대남자는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흠... 그건 그렇다 치고. 돈 좀 빌려줘라.


전당포 남자는 옳거니 하는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비꼬는 투로 말했다.

- 어쭈. 아까는 춥네, 전당포가 어떻네 그렇게 큰소리치더니 결국 돈 구걸이야? 여기까지 온 걸 보니 볼짱 다 봤군.


남자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담배를 한 개비 빼 어물 말했다.

- 뭐 어때서? 여기 합법적으로 돈 빌려주는 곳 아니야?

전당포 남자는 대의 입에서 담배를 낚아채며 말했다.

- 담배 끊으라니까. 그 잘난 머리로 제1금융권에는 명함도 못 내미는 건가?

- 그러게 말이야. 안전한 것만 이자 받아먹을 것 같으면 대출해 준다는 말을 하지를 말던가. 사업이 잘되면 어디 간들 돈을 못 빌리겠어?

남자는 너스레를 떨며 얘기했다.


너스레를 떠는 상대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전당포남자가 말했다.

- 넌 가만 보면 멍청하긴 한데 머리가 좋은 구석이 있어. 그러니 그 좋은 머리 현실감 있게 좀 써.


- 나만큼 현실감 있는 사람이 어디있다고? 약속전당포보다 내가 100배는 현실감 있어. 잔말 말고 돈이나 빌려줘봐. 너 어려운 사람 돕는다고 시작한 거라며? 어려운 친구도 좀 도와주라.

상대남자는 큰 소리치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전당포 남자는 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 못 받는 셈 치고 그냥 줄 테니, 이번에 안되면 정말로 그만둬.

- 슨 소리야? 이래 봬도 리버스엔지니어링 창업주라고. 내가 정식으로 좋은 조건에 계약해 주지.

- 창업주? 하하하. 직원 한 명도 없이 입만 살아서.


상대남자는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강조했다.

- 고 보라고! 중에 나한테 아쉬운 소리 할 때가 올 거야. 그런 의미에서 내가 영광스러운 두 번째 고객이 되어주지. 떤 약속을 맡기면 되려나...

- 약속이라...

- 그래. 떤 약속으로 할까?


전당포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상대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 음... 네가 하려는 그 꿈. 그게 변하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하지.

- 내 꿈? 당연하지. 난 돈 없는 사람들도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약을 개발할 거야. 지금까지는 없었던!

상대남자의 눈빛 속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자신감이 흘러나왔다.


***기진 잠입 5년 전


- 부회장님, 지금의 방식은 선친의 경영 방침에 위배됩니다.

방 한쪽에 서 있던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머리는 희끗희끗했고, 나이 든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 아버지의 방침 제 방식이 뭐가 위배된다는 거죠?


부회장은 책상 위에 펼쳐진 보고서를 훑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펜을 들고 있었다.

비서실장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 회장님께서 지향했던 바를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그 말에 부회장은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비서실장을 정확히 겨냥하며 가만히 응시했다.

- 호하지 않게 말씀해 주시죠.


비서실장은 한걸음 더 다가와 말을 꺼냈다.

- 선친이 부약을 먼저 개발하고 집중한건 순수하게 원래 개발하고자 했던 정약의 개발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부약을 판매하려고 한 게 아닙니다.


부회장은 비서실장의 말을 끝까지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 그러니까요. 그게 뭐가 안 맞다는 거죠? 저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고 있는 겁니다.


비서실장은 그의 단호함에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 최근 판매량을 보십시오. 만들기 쉽고 부작용이 있는 부약만 잔뜩 생산하고, 정작 중요한 정약은 생산을 하지 않 있습니다.

- 맞아요... 그게 문제예요. 부약에 대한 임상실험이 너무 적으니까 제대로 된 약을 못 만드는 거잖아요.


비서실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결의에 찬 눈으로 말을 이었다.

- 부회장님, 저는 선대 회장님 곁에서 수십 년을 함께하며 배운 것이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가장 두려워하신 것은 회사의 쇄락이 아니라, 회사가 ‘정체성’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부회장님. 시대가 변했고,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변화라는 이름으로 회사의 근간을 흔들어선 안 됩니다.

지금의 방향이 과연 우리 회사가 지켜온 신뢰를 유지할 수 있을지, 부회장님께서 다시 한번 고민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부회장은 그의 말을 들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이 천천히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눈을 뜨고 비서실장을 바라봤다.

- 실장님, 당신의 충고는 항상 귀담아듣습니다. 제가 지키려는 것도 결국은 이 회사의 정체성입니다. 앞으로도 회사를 위한 실장님의 마음은 변하지 않으실 거죠?


비서실장은 부드러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 물론입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회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 , 오늘은 좀 피곤하네요. 실장님도 그만 들어가시죠.

깍듯이 인사하고 돌아서 나가는 비서실장을 본 뒤 부회장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강팀장님, 업하랴 테스트하랴 고생이 많죠?

- 네.. 네! 부회장님, 아닙니다.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미각제거 효과를 광고하고 또... 다른...

전화기 건너편의 상대방을 향해 벌떡 일어서 전화를 받는 강혁수였다.

부회장은 말을 자르고 물었다.

- 다이어트 말고 다른 용도로는 쓸데가 없나요?

- 네... 아무래도... 효과 자체가 워낙...

- 그럼 더 이상 생산하지 말고 재고나 처리해 주세요. 대신 노화 관련 연구에 자원을 더 집중해 주세요.

- 아... 이번 신규 프로젝트 말씀이가요?

강혁수는 시나 해서 재차 물었다.

- 네, 테스트할 60대 대상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마침 우리 회사에 애사심이 많은 분이 계시니 기회를 한번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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