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한다는 약속은요?
- 안됩니다.
사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 뭐가 되고 뭐가 안되는지 알려주셔야 저희가 맡길 약속을 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약속전당포를 찾은 남녀는 답답함에 불만이 새어 나왔다.
- 약속은 우선 지킬 수 있어야...
- 저희 사랑 지킬 수 있다니까요. 맹세한다구요
남자는 사장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사장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다시 말을 꺼냈다.
- 말로 하는 약속이 아닌 객관적으로 입증 가능한 약속이요.
남자는 여자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나더니 여자를 껴안으며 말했다.
- 자! 보세요. 저희 사랑한다니까요. 객관적으로 보여드릴 수 있잖아요.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여자가 사장과 남자의 표정을 살피더니 마지못해 나지막이 말했다.
- 오빠... 결혼...
남자는 순간 뇌리에 뭐가 꽂힌 듯 사장을 향해 소리쳤다.
- 그래! 결혼! 저희 결혼약속하면 되잖아요?
[계약서]
약속 : 계약자 ㅇㅇㅇ은 ㅇㅇㅇ와 결혼을 약속함.
금액 : 5천만 원
전당포를 나오는 남자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는 특유의 자신감을 내비치며 말했다.
- 이야. 봤지? 오빠가 이런 거 또 기가 막히게 잘하잖아.
- 그래. 오빠... 이제 우리 이 돈으로 빚 갚고... 열심히 돈 모아서 약속대로...
남자는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 그래그래! 이제 정말 제대로 시작하는 거야.
작은 카페의 공기가 갑갑하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잔을 감싼 채 설명을 듣고 있었다. 따듯했던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고, 주변테이블의 재잘재잘 말소리들이 그녀에게 향한 단어들을 잡아먹는 듯 그녀는 한동안 미동이 없었다. 이도영은 한참을 기다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결혼 약속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녀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커피잔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도영의 뒤에 있던 김기강이 불쑥 말을 꺼냈다.
- 약속이 유효하지 않아 돈을 갚으셔야 합니다.
이도영은 손을 들어 김기강의 말을 제지했다.
-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테이블을 응시한 채로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말을 꺼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이도영은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 다시 닫기를 반복했다.
- 그리고 돈은... 제가 쓰지 않았어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이도영은 조용히 말했다.
- 지불 계약자가 ㅇㅇ씨 앞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들어 올리려다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한가닥의 기대가 서서히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쌓아 올렸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커피의 온기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힘을 내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 사실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될 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애써 부정했어요. 그럴 리 없다고...
돈은... 시간을 더 주세요...
그녀의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이도영은 울부짖는 그녀를 뒤로하고 먼저 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김기강은 곧 따라가겠다며 카페 주변에 있다가 이도영이 사라진 뒤 여자를 찾아가 말했다.
- 보험 든 거 있잖아요. 사망보험
- K는 전당포일을 왜 그만둔 거죠?
사장은 책상에 엉덩이를 반쯤 걸친 채 잠시 회상에 잠겼다.
- 음... 왜?라는 질문에는 답하기 어렵군. 어떻게?라고 한다면 균형문제라고 할까....
- 균형이요?
여사무원은 궁금한 듯 다음 말을 재촉했다.
- 전에도 얘기했지만 전당포일을 하려면 다정함과 매정함의 중간 어디쯤... 아니... 상황에 따라 양쪽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지.
이도영은 정이 너무 많았어... 반면 K... 아니... 김기강... 은 그 반대편 극단에 있었지.
한동안은 제법 균형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 서로의 극단을 보완하면서...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도영이 맡은 고객의 대금 회수는 지연되고... K는 칼같이 지켰지... 그러다 K가 이도영의 고객까지 관심 갖기 시작했어...
K의 자리에 있는 서류는 항상 각이 잡힌 채로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고, 그의 펜은 항상 같은 방향을 향해 놓여 있었다. 손끝 하나 허둥대거나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그의 일처리는 철저했고, 실수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듣는 이의 감정 따위는 그의 우선순위에 없었다. 상대방의 표정이나 말투에 반응하지 않고, 그저 기계처럼 행동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속도와 정확성은 탁월했고, 누구보다도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 본인에게 쌓일 감정의 부채를 핑계 삼아 회사에 부담을 떠 안기는 건 자격미달입니다.
그의 입에서 자주 나오던 말이었다.
칭찬에도 무덤덤했고, 실패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게 계획된 결과인 것처럼. 그에게 사람들과의 유대감은 그저 불필요한 소모처럼 보였다.
- 그럼... 어떤 사건이 있었던 건가요?
- 본인은 부정하지만... 고객을 죽음에 몰아넣었어...
여사무원은 순간 놀라며 되물었다.
- 네? 고객안전담당이 고객을 죽음에요? 이해가 잘...
사장은 잠시 천장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 고객이었을 때까지는 완벽히 안전을 담당했지. 고객이었을 때까지는...
여사무원은 사장의 말을 들으며 시계를 계속 주시했다.
- 음... 듣고 보니 이름에 K가 세 번 들어가서 K인 거죠?
사장의 설명이 길어지자 여사무원은 간단한 질문으로 대화의 흐름을 돌렸다.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 Kelvin의 앞글자 K... 어디서 그 단어가 갑자기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온도를 재는 단위인 Kelvin이라는 단어... 유독 마음에 들어 했어. 그 단어를...
여사무원은 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 박기진 씨한테 연락이 오지 않고 있어요. K에게 의뢰는 안 하신다는 거죠?
- 그래.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
박기진은 의자의 구속에서 풀려나자 긴장을 풀며 K에게 감사를 표했다.
- 사장님이 그래도 타이밍 좋게 지원을 보내주셨네요.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습니다.
K는 박기진을 돌아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 이제 송판영을 구하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