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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잠입(3)

by 공부남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환한 빛이 눈꺼풀을 뚫고 들어왔지만 머릿속은 아직 몽롱했다. 박기진은 고개를 돌려보려 했지만, 목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가운 금속이 목 주변을 감싸고 있었고, 두 팔 발목 역시 의자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침울한 회색 벽과 삼각대 위의 카메라였다. 조명 차갑게, 숨소리는 스산하게 고요한 공간 속으로 퍼져나갔다.


박기진이 숨을 고르며 상황을 정리하려 애 무렵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박기진은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일정한 패턴의 발소리가 바닥을 스치며 점점 가까워졌다. 발소리가 잠시 멈춘 순간 등 뒤로 느껴지는 묘한 기운이 온몸에 전달됐다. 뒤에 있는 누군가를 직접 볼 순 없었지만, 등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내 발소리가 다시 움직이고, 천천히 주 천천히 박기진의 오른쪽으로 다가왔다. 박기진은 목덜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며 눈을 질끈 감았다.


- 박기진 씨?

높낮이가 없는 마른 첫마디가 고요함을 깨뜨렸다.

박기진은 눈을 뜨지 않 채 침묵을 유지했다.


- 을 뜨세요.

박기진은 고개를 저으려다 눈을 더 질끈 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음... 저를 안 본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이미 은 것을 알아버렸으니까.


박기진은 눈을 감은 채 말을 꺼냈다.

- 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는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 음... 그런가요?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박기진 씨 주머니에 이런 게 있더라구요.


그는 박기진의 눈앞에 무선호출기를 들어 보였다.

박기진은 실눈을 살짝 뜨고 앞을 쳐다봤다.


- 세상엔 쓸모없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우리 회사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주고 있는데... 가끔 그 기회조차 걷어차버리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쓸데없는 호기심 때문에...


-...


박기진은 말을 뱉지 않고 꿀꺽 삼켰다.

아무 말이 없자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 음... 박기진 씨도 나름 무능력을 증명해서 지원자격을 얻었 텐데...


그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자신에 찬 어투로 ‘무능력’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그가 박기진을 가르치려는 듯한 느낌을 받자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기진은 질문을 던졌다.


- 무능력 증명한다니…?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는 걸 느끼며 살짝 화가 난 듯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그는 양손을 올려 으쓱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 우리 회사 비전! 누구에게나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준다. 다른 회사들은 너무 쉽게 사람을 뽑고 있어요. 성적이니 외모니 이것저것을 따고, 입사하고 싶어 이미 줄 선 사람들을 한 기준으로 다시 줄 세우는 방법 말이죠.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 우리 회사는 달라요.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는 회사.


박기진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 웃기지 마! 그냥 돈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모아다가 이용하는 것뿐이잖아!


박기진을 응시하던 그는 아랫입술을 굳게 다물어 올리며 한숨을 한차례 쉬었다.


- 렇다니까요. 쓸모없는 사람의 쓸모없는 외침. 어쨌든 박기진 씨는 특별한 대우를 해드리려구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말이죠.


박기진은 목소리를 한 톤 높여 대답을 했다.

- 는 테스트를 안 겠다고!


그는 갑자기 박수를 치며 활짝 웃었다.

- 아요. 원래 받으려던 테스트는 취소했어요. 대신 특별한 테스트로 비했죠.


그는 눈을 크게 한번 뜨고는 뒤로 돌아 박기진 어깨에 손을 올렸다.

- 참! 특별한 여인 만큼... 높은 확률로...

그 말을 듣는 순간 박기진은 가슴이 철렁하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 아니 그게 무슨! 빨리 이거나 풀어.

그는 박기진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서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 어디까지나 박기진 씨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겁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등 뒤의 발소리가 천천히 멀어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다시금 공간을 채웠다. 박기진은 눈앞의 카메라를 매섭게 노려봤다.

잠깐동안의 적막을 깨고 박기진의 시야에 검은 양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한 명이 말없이 트레이를 들고 다가왔고, 그 위에는 투명한 액체가 든 주사기와 작은 의료용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검은 양복의 직원은 의자에 묶여 있는 박기진 앞으로 다가와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는 조용히 장갑을 끼고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박기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고정장치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뭐 하는 거야... 그만둬!

박기진은 목소리를 높였지만, 검은 양복의 직원은 아무 말 없이 그의 팔에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 박기진의 팔을 고정시키고, 다른 손으로 주사기를 가져가는 그의 동작은 매끄럽고 정확했다. 박기진은 눈을 부릅뜨며 그를 노려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사가 박기진의 피부를 스치기 직전, 직원이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 눈 감아


그의 말은 짧고 조용했다. 주사를 놓은 직원은 트레이를 치우며, 다른 직원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서 있던 또 다른 직원은 메라 뒤쪽으로 이동했고, 박기진에게 주사를 놓은 직원도 그를 따라가더니 메라를 만지는 틈에 재빠르게 주사를 목에 찔러 넣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주사액이 투입되자, 찔린 직원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몇 번 몸을 비틀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동료를 흘끗 내려다보더니, 그는 주사기를 트레이 위에 툭 내려놓고 박기진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은 침착하게 박기진의 손목을 묶고 있던 고정장치를 풀기 시작했다.

고정장치가 하나씩 해제되는 동안 안도하는 마음과 함께 의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 누... 구시죠?

그는 마지막으로 발목에 있던 장치를 풀며 짧게 말했다.


- K


- K... 요?

어리둥절하고 있는 박기진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


- 고객안전담당이라고 하면 알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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