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 좀 더 조사해 보고 결정해야겠어.
여사무원은 고개를 저었다.
- 맡기기로 한 거, 직접 하려다가 이렇게 되었잖아요. 굳이...
사장은 여사무원의 말을 자르고 박기진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 끝내지 못한 일은 마무리해야겠지?
방금까지 정의감에 힘 솟아 열변을 토했던 박기진은 여사무원과 사장의 대화를 들은 뒤 다시금 현실감을 찾았다.
- 아... 사장님, 고객건은 이제 고객을 위해서도 회사를 위해서도 전문가분께서 하는 게 맞는 것 같고... 이제 저는 새로운...
사장은 눈빛으로 박기진의 말을 제압하며 말을 이었다.
- 삼백
- 네?
- 수당. 삼백만 원
어느새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박기진이었다.
그놈의 돈!
사무실을 나설 때 사장은 박기진에게 무선호출기와 작은 접이식 우산을 주었다.
느낌이 이상하면 바로 나오고, 혹시 급한 일이 생기면 호출기를 누르라는 메시지도 함께였다.
안내받은 시간보다 30분 전 여유 있게 전철역에 도착했지만 하늘에선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신발과 옷이 젖는 게 싫어 빗발이 약해지면 전철역 밖을 나설 참이었다. 하지만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는 더 세차게 내렸고 지하철 입구에는 한 여학생과 나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소나기라 금세 지나가겠거니 했는데 최근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다. 문득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전해 듣기로 예전에 장마라는 것이 있었다고… 장마는 몇 날며칠이고 오랜 기간 비가 내리는 것이라고 했다.
회상에 젖은 것도 잠시, 시계를 본 박기진은 전철역을 나서야겠다고 판단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동지애라도 생긴 것일까. 여학생만 두고 혼자 가기 미안한 생각에 말을 걸었다.
- 저기, 괜찮으시면 우산 저랑 같이 쓰세요
우산을 펼치며 여학생 옆으로 다가간 박기진은 흠칫 놀랐다. 교복을 입고 있어 여학생으로 짐작했는데 그녀는 확연한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순간 놀란마음을 재빨리 진정하고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으며 다시금 물어보았다.
- 저, 우산이 없으신 것 같은데 같이 쓰시겠어요?
여학생, 아니 할머니는 박기진을 무심히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박기진은 우산을 할머니에게 기울인 채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박기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의 걸음은 마치 초점이 없어 보였다. 빗속을 그저 정해진 방향 없이 천천히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걷는 속도로는 시간을 맞출 수 없어 조급해졌다.
- 이 우산 쓰고 가세요!
박기진은 우산을 할머니 손에 쥐어드리고, 손을 들어 머리를 가린 채 목적지를 향해 뛰었다.
짧은 거리였는데도 비에 쫄딱 젖었고, 얼굴에 흐르는 것이 땀인지 빗물인지 모르게 헐레벌떡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로비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위해 모퉁이에 있는 화장실로 급히 들어갔다. 문을 미는 찰나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나오는 사람과 문이 부딪혔다. 밀던 힘을 급하게 뺐지만 열린 문 틈사이로 잔뜩 찡그린 얼굴의 남자와 마주쳤다. 박기진과 대조적으로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그의 입에서는 자동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 ㅇㅇ새끼, 눈을 어디다 뜨고 다니는 거야!
박기진은 죄송하다며 비굴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 ㅇㅇ 같은 새끼가…
그는 습관적인 듯 손을 위로 쳐들었다가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손을 내리고 박기진을 밀치며 옆으로 지나갔다.
밀쳐지며 언뜻 내려다본 그의 슈트 속 쇄골옆에 문신이 보였다. 작은 술병 모양이었다.
우선 급한 데로 휴지로 옷을 닦고 머리를 매만져 봤지만 거울 속 박기진의 모습은 물에 빠진 생쥐꼴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안내받은 강당으로 들어선 박기진은 앉지 않고 뒤쪽에 섰다. 의자까지 적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앞쪽에는 화장실 문신남도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혹시 마주칠까 봐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호명을 기다렸다.
사장은 이번에 가는 장소가 일종의 테스트장소로 송판영이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 박기진 씨?
직원이 차트를 보며 여러 번 같은 이름을 호명했다.
- 아... 네! 접니다
잠시 딴생각에 잠겼던 박기진은 손을 들며 직원을 따라나섰다.
따라간 곳은 일종의 테스트룸으로 안에는 간이침대와 검사기구로 보이는 것들이 즐비해 있었다. 살짝 긴장한 박기진은 주머니 속 무선호출기를 만지작 거렸다.
검사원은 감정 없는 퉁명스러운 어투로 내게 물었다.
- 땀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젖었죠?
- 아... 밖에 비가 갑자기 많이 와서...
검사원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에 눈매가 가늘어졌다가, 고개를 한번 갸우뚱한 뒤 하던 절차를 지속했다. 채혈 등 일반적인 건강검진과 IQ Test 등의 지능, 심리 검사가 진행되었다.
한 시간가량이 흘렀을까. 박기진은 3번 사무실로 배정받았다. 안내받은 사무실에는 박기진을 포함 여섯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얼마 뒤 말끔한 단발머리의 검은정장을 입은 여성이 들어왔다. 미소를 띤 얼굴 위로 어딘가 모르게 차가운 느낌의 매력이 풍겼다. 그 여성은 본인을 인사담당 매니저라고 소개하며 말을 꺼냈다.
- 먼저 저희 회사에 지원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희 회사는 사회와의 조화를 강조하고, 공동의 사회 발전에 힘쓰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는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인지 차별하지 않고,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면접의 기회도 없이 서류심사에서 항상 고배를 마시던 예전의 자신이 생각나는 박기진이었다.
- 저희는 외부에서 정해놓은 경력 등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람들을 줄 세워 판단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제로 베이스에서 테스트로만 지원자를 확인하고, 누구에게나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적합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기 드리는 안내문을 읽어보시고 계약서에 서명을 하시면 절차가 완료됩니다.
건네받은 안내문에는 복지규정등이 적혀있었고, 그중에 하나 눈에 띄는 조항이 있었다.
- 사망 시 회사 자체 상조프로그램에서 무료로 장례절차를 진행 -
회사에서 장례까지 치러준다니 복지가 좋은 회사라고 생각했다.
앞쪽의 어떤 남자가 손을 들었다.
- 저는 테스트에 참여하면 돈을 준다고 해서 지원한 거고, 무슨 일을 하려고 한건 아닌데요.
인사담당 매니저는 표정변화 없이 대답했다.
- 기회를 드린다고 한 것이고, 꼭 어떤 일을 시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서류 내용 보시고 지원 타입을 결정 후 제출해 주세요.
사무실의 모든 이가 서류 내용을 살피는 동안 박기진은 고심에 빠졌다. 박기진은 조사를 하러 온 것이지 테스트에 참여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쯤에서 빠지는 것이 맞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서류 마지막에 적힌 내용이 박기진을 고민에 빠뜨렸다.
[테스트 타입 선택]
B : 보상금 2천만 원
W : 보상금 2백만 원
' 여기서 그만두고 나가면 돈도 못 받고, 조사한 것도 없는데...'
박기진은 주머니 속의 무선호출기를 생각하며, 여차하면 무선호출기가 있으니...
'그건 그렇고... 타입에 따라 보상금이 너무 차이 나는데...'
박기진 말고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듯했다. 이때 매니저가 말을 꺼냈다.
- B타입은 최대 3명만 가능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들 펜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박기진도 B타입에 체크를 하려다가 잠시 펜을 멈췄다. 10배... 10 배면...
고민하는 사이 B타입은 마감이라는 말을 듣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W에 체크하고 서류를 제출했다.
서류를 제출하면서 살펴보니 3번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언뜻 어떤 공통점이 보였다. 모두 건장한 체격의 남자?
- 클러스터링인가?
- 네, 아무래도 송판영만 특별히 설계해서 끌어들인 건 어떤 대상의 테스트군 숫자가 부족하다는 반증이죠. 박기진 씨가 지원한 상시지원과는 차이가 큰...
- 이런 경우 보상금액과 리스크가 비례하나?
여사무원은 고개를 저었다.
- 아얘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장님께서 궁금해하시는 것에는 상관성이 없다고 봐야겠죠.
- 보상금이 낮아도 리스크가 클 수 있다는 건가?
- 알 수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