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뒤 덩치의 어깨 뒤편으로 작은 체구의 후드티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빠르게 주변을 살피더니 예의 바른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 전당포에서 나오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박기진은 사뭇 다른 분위기에 내심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 아 네... 누구시죠?
그 남자는 웃으면서 본인소개를 했다.
- 저는 강혁수라고 합니다.
저희 직원이 실수를 했더라구요.
박기진은 그의 나긋나긋한 태도에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강혁수는 덩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을 이어나갔다.
- 이 친구가 워낙 말주변이 없고 몸이 먼저 앞서는 스타일이다 보니 일을 번거롭게 만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니 이제 좀 비켜주실 수 있을까요? 시간을 꽤 허비해서요. 고객님은 저희가 잘 모시고 가겠습니다.
박기진은 상황을 판단할 만한 정보가 부족했기에 머뭇거리며 얘기했다.
- 아... 제가 인턴이라 어찌해야 할지... 아 맞다! 저희 회사에서도 누군가 온다고 했거든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강혁수는 박기진에게 다가오며,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한쪽 손을 들어 뒤에 있던 송판영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 고객님, 이제 출발하시죠. 회사에 시간약속 안 지키는 걸 싫어하는 분이 계셔서. 아까부터 뒤에만 계시니까 저희가 억지로 데려가는 것 같잖아요. 앞으로 나오세요.
강혁수는 박기진 앞에 마주 보고 서서 주머니에서 명함지갑을 꺼냈다.
- 요새 회사일 하기 참 힘들어요. 그죠?
그는 지갑 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박기진에게 내밀었다.
강혁수
리버스엔지니어링 상무이사
박기진은 명함에 잠시 한눈 팔린 순간 갑자기 시야가 흐려짐을 느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할 틈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강혁수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 어? 갑자기 쓰러지셨네요. 괜찮으세요? 고객...
박기진은 서서히 의식을 잃으면서 송판영이 그들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어쩔 수 없겠어...
박기진은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게슴츠레 눈을 뜨며 주위를 살폈다. 그는 전당포 소파에 누워있었다.
- 저... 어떻게 된 거죠?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문을 연 박기진을 향해 사장이 고개를 돌렸다.
- 뭘 어떻게 돼. 길바닥에 쳐 누워있던걸 들어다 여기 모셔다 뒀지.
박기진은 뒷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 아니요. 저 말고 고객님. 송판영 씨요.
사장은 비꼬는 투로 말을 받았다.
- 고객을 만나러 간 건 기억하나 보네?
- 저도 뭐가 뭔지... 어떤 후드티입은 남자가 다가온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순간 정신을 잃었어요.
사장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책상 위에 무언가를 집어 박기진에게 던졌다.
박기진은 손을 들어 사장이 던진 무언가를 잡아챘다. 손을 펴보니 단추만 한 작고 동그란 칩이었다.
- 이게 뭐죠?
- 네가 길바닥에서 잠자도록 도와준 물건. 리엔이라는 회사 제품이지. 피부에 붙이고 약간의 압력을 가하면 안에 있는 작은 바늘 통해 약품이 투입되고... 웬만한 성인들도 10초 안에 정신을 잃지.
박기진은 당시 상황을 되새김질해 보았다. 후드티남자... 강혁수가 박기진에게 명함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고... 악수... 살짝 따끔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긴장한 탓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박기진이 당시 있었던 일을 복기하는 동안, 사장도 5년 전 그날이 다시금 기억에 떠올랐다.
[5년 전]
말끔한 옷을 입고 사무실에 들어온 그는 자신을 강혁수라고 소개했다. 그의 눈꼬리는 부드럽게 아래로 향해 있었고, 미소를 띤 입술은 친근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 만큼은 아무런 온기나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 그 시선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어떤 의도가 담겼다. 그의 표정이 어딘가 어색한 것은 그의 시선만큼은 웃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 사장님, 저는 여기 물건 맡기러 온 건 아니구요. 제안을 하나 하러 왔습니다.
사장은 생글생글 웃는 그의 표정에서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 듣자 하니, 전당포 같은 사업들이 최근 상황이 안 좋다고 하더라고요. 하긴 시대가 변했으니... 어쩔 수 없는 절차라고나 할까요?
사장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을 계속 들었다.
- 뭐, 다른 데와 달리 여긴 좀 특별한 구석이 있으니... 저희도 특별한 제안을 하나 하려고요. 전당포 입장에서도 경영난해소에 도움이 될 테고...
- 본론만 말하시죠.
강혁수는 활짝 웃으며 케이스 하나를 내밀었다.
- 저희가 밀고 있는 제조업이 하나 있는데요. 거기서 최근 제작한 신제품이 있는데, 이게 아직 시중에 판매하기에 절차가 좀 남아있어서요. 일종의 테스트 같은 건데... 전당포에서 적합한 사람을 찾으면 한 번 사용해봐 주셨으면 합니다. 보수는 한 명당 500씩 어때요?
- 테스트라고 한다면 약물?
강혁수는 엄지를 앞으로 내밀며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올려 긍정의 메시지를 보냈다.
- 맞습니다. 요새 워낙 힘든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 분들 위해서 만들고 있는 제품들이에요. 일종의 감각을 조정하는? 청각이라던가...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얘기했다.
- 다른데 알아보시죠. 우리 고객 중에 그런 거 필요한 사람은 없으니까.
강혁수는 입술을 꾹 다문채 위로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글쎄요. 고객이 필요하진 않더라도 사장님이 필요하실 수도 있으니...
강혁수는 프로모션용으로 샘플을 두고 간다며 사무실에 케이스를 두고 나갔다.
약속 전당포가 경영난을 겪은 이유 중 하나는 약속의 강제력 부족이었다. 약속 중에는 약속이 이뤄진 건지 아닌지 모호한 약속도 있었고, 계약한 약속을 그냥 이행해 버려도 어쩌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다.
사장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 찾아왔다.
'세계 최고의 요리사가 되겠다는 약속도 가능할까요?"
잠시 회상에 빠졌던 사장은 옅은 한숨을 길게 내쉰 뒤 말을 이었다.
- 어쨌든 리엔이라는 회사로부터 우리도 몇몇 제품을 받아서 썼었는데... 효과가 좋은 만큼 부작용도 많아서 거래를 끊었지.
- 리엔이라는 회사랑 거래를 했었다구요?
박기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 이게 송판영씨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요?
- 타겟팅...
- 타겟팅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사장의 말을 그대로 되물었다.
- 리엔이 송판영을 표적으로 잡고 설계를 한 거 같아... 아니. 설계를 한 거지. 송판영이 우리 회사에 오기 전부터...
- 송판영씨가 저희에게 약속을 맡기기 전부터 리엔이 연관되어 있었다구요?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사무원에게 손짓했다.
여사무원은 박기진에게 전단지 한 장을 내밀었다.
[임상실험 모집]
. 자격조건 : IQ 155 이상
. 성별 : 남자
. 보수 : 1억 원
. 기타 참고사항.
- 송판영씨 집에서 발견한 전단지예요. 리엔에서 송판영에게 보낸 거죠. 보수액은 1억. 리엔에서 자주 하는 수법으로, 실험에 필요한 대상자를 선정하고, 대상자가 실험에 참여할 수밖에 없도록 과정을 설계합니다.
박기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 임상실험 보수액으로 1억은 듣도 보도 못했어요. 금액만 보면 일반적인 실험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데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이걸 누가 지원하겠....
박기진은 말을 하다가 설계라는 단어가 불현듯 뇌리에 꽂혔다.
'참여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를 한다고?'
- 그럼 송판영씨가 전당포에 와서 약속을 하고 돈을 빌리게 만든 것도...
여사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맞아요. 그럴 수밖에 없게끔 계획을 세웠다고 보는게 앞뒤가 맞아요.
박기진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지만 제일 먼저 떠오른 궁금증을 물었다.
- 하필이면 왜 송판영씨를 타겟팅했죠?
사장은 예상했던 질문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 시스템... 그냥 그럴만한 사람이 찾아지면 그 사람이 타깃이 되는 거야. 하필이면 왜 송판영이 아니고, 어떤 기준이 시스템에 입력되었는가가 중요하지.
- 어떤 기준...?
- 어떤 기준인지는 더 알아봐야겠지만 이 정도 설계를 했다면 타겟팅할 대상이 많지는 않다고 봐야겠지.
- 타겟팅한 대상은 어떻게 되는 거죠? 송판영씨는요?
사장은 담배를 꺼내물며 잠시 뜸을 들였다.
- 포기해야겠지...
- 포기한다고요? 고객을 지키는 게 저희 일이라면서요?
사장은 박기진을 노려보았다. 잠시 주눅이 든 박기진은 고개를 잠시 떨구었다가 갑자기 벌떡 소파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 억울하잖아요! 설계된 거라면서요? 본인이 의도하거나 우연이 아니라 3자에게 설계된 대로 이렇게 가는 게 맞아요?
사장은 벽 모서리에 기대 담배를 한 모금 내뱉은 뒤 박기진을 바라봤다.
- 누가 고객을 포기한다고 했나? 포기하는 건 돈이야.
여사무원은 대화에 끼어들며 사장에게 물었다.
- 돈을 이체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