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진은 다른 남자 한 명과 한 조가 되었다.
2인 1조로 테스트를 받는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알 수 없었다. 살짝 긴장이 되긴 했지만, 도심 한복판에 있는 대형건물 안에 있다는 것과 주머니의 무선호출기가 긴장감을 누그러뜨렸다.
같은 조가 된 둘은 서로 흘긋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을 꺼내진 않았다.
많이 봐줘도 20대 초반, 다부진 체격에 비해 앳된 얼굴이었다. 박기진이 먼저 같은 조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말투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의 나이를 더욱 어리게끔 생각하게 했다.
- 전에도 참여해 보신 적 있나요?
- 아... 아니요... 처음이에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하는 그였다.
혹시나 작은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말을 나눠 봤지만 별소득이 없었다. 보통 이런 곳에는 베테랑이 있어서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기도 하던데...
- 우선 서로 호칭이라도 나눌까요?
전 박기진이라고 합니다.
- 네... 저는 김민철입니다.
호명이 되면 한 조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올라간 누군가가 내려오는 걸 보진 못했다.
박기진은 엘리베이터 위 디지털 전광판의 빨간 숫자가 어디서 멈추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숫자에 주목하고 있을 무렵 엘리베이터 옆 비상문이 갑작스럽게 벌컥 열렸다. 쇠문이 열리며 나는 끼익 소리가 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열린 문 사이로 한 노인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양손을 벽에 짚고 힘겹게 몸을 가눴다.
머리가 흐트러져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지만, 안쪽에 얼핏 보이는 눈동자만큼은 매우 선명했다. 그 노인이 복도 바깥쪽을 향해 고개를 들 때 눈빛 속엔 간절함과 필사적인 의지가 담겨 있었다.
노인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박기진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신발이 바닥을 끌며 움직일 때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지만, 멈추진 않았다. 얼굴엔 고통과 긴박감이 교차하며 땀이 맺혀 있었고, 거친 숨소리가 공기 속에서 선명하게 들렸다.
그는 오로지 앞만 바라보며 발을 내디뎠다. 그러다 박기진과 가까운 엘리베이터 앞쪽에서 무릎을 꿇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뒤로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헐레벌떡 비상구문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빠르고 무심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며 노인을 향해 다가왔다.
박기진과 김민철은 잠시 서로 눈을 마주친 뒤 본능적으로 달려가 바닥에 쓰러진 노인을 손으로 부축했다. 노인은 식은땀을 많이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 쉬다 잠시 정신을 잃은 듯했다.
- 누가 119에 신고 좀 해주세요
박기진은 복도에서 호명을 하던 직원을 향해 외쳤다. 그 직원은 전화기로 신고를 하는 대신 손가락으로 박기진 뒤를 가리켰다.
인사매니저로 만났던 여성이 어느덧 잰걸음으로 다가와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 앞에 회사차가 있으니 바로 병원으로 모시고 가도록 하죠.
그녀와 함께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노인을 부축하려고 하자 박기진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 제가 직접 할게요.
박기진은 노인을 부축해 차로 옮겼다.
노인을 차 뒷좌석에 앉히고 시트 사이에서 팔을 빼는 순간 노인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박기진에게 속삭였다.
-사… 살려줘…
박기진은 노인을 안심시키려 웃으며 말했다.
- 네, 할아버지. 곧 병원으로 모셔다 드릴 거예요.
노인을 안심시키고 차밖으로 몸을 빼다가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면 놓쳤을 만한 것이 보였다.
술병모양....
쇄골 쪽의 문신을…
그것은 지난번 화장실에서 잠시 스쳤던 젊은 남자의 그것과 같았다.
노인이 같은 모양의 문신을 동일한 부위에 갖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가. 박기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떠나는 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멍하니 서 있던 박기진에게 여매니저가 다가왔다.
그녀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 도와주신 덕분에 잘 처리되었네요.
박기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 네... 그런데...
박기진은 말을 하려다가 그만뒀다.
그녀는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물었다.
- 뭔가 하실 말씀이?
박기진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 아... 테스트는 얼마나 걸리는지... 해서요.
그녀는 갸웃하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 글쎄요... 그건 왜요?
박기진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박기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 아, 제가 시간을 착각해서... 지금 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한데 테스트는 다음에...
그녀는 찰나의 순간 눈매를 가늘게 접는 듯하더니 이내 평소 모습으로 말했다.
- 네, 알겠습니다. 사무실에 가서 행정처리부터 하시죠.
날카로운 힐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울렸다. 박기진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그녀를 따라갔다. 테스트를 받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뒤집은 뒤부터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여매니저의 눈치를 살폈다. 엘리베이터 앞 그녀는 별다른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갑자기 못한다고 해서...
박기진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여매니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살짝 미소를 짓는 듯한 입꼬리와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괜찮습니다. 저희 회사는 모든 걸 자율적으로 하거든요.
여매니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준비가 안 됐을 때는 물러서는 것도 현명한 판단일 수 있어요. 하지만 기회가 자주 찾아오진 않죠.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끝에 담긴 무언의 압박은 날카롭게 느껴졌다.
둘 사이의 대화는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여매니저는 여전히 친절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박기진은 그녀의 친절한 태도가 더욱 부담스러웠다. 뭔가 빚을 지는 느낌이었다.
사무실 앞에 도착한 뒤 박기진은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사무실 안에 있던 계약서를 찾아 살펴보며 얘기했다.
- W타입 선택하셨고... 특별한 건 없네요. 검사 비용만 지불하고 가시면 됩니다.
- 검사 비용요?
그녀는 박기진을 올려다보며 얘기했다.
- 네, 오전에 받으신 검사비용. 3백만 원만 내시면 됩니다.
박기진은 비용을 듣고 놀라 되물었다.
- 3백만 원이요? 테스트 보상금이 2백만 원이라고 들었는데...
- 네, 검사비용 3백, 보상금 2백 합해서 테스트예산으로 총 5백만 원이 책정되어 있어요. 박기진 씨는 테스트를 포기하셨기 때문에 검사비용을 청구하는 거고요.
박기진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되물었다.
- 어... 그런 거 있잖아요? 검사를 받았는데 테스트할 만한 상황이 아닐 경우. 예를 들면 건강이 이상하다거나. 그럴 경우 지원자에게 귀책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 네, 그렇죠. 그렇지만 박기진 씨는 테스트에 적합하다고 판단이 되어서 계약서에 서명하셨잖아요.
박기진은 또박또박 논리적인 그녀의 대답에 말문이 막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꺼냈다.
- 저기 할 말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좀 예민한 건지 모르겠는데요. 이상한 게 있습니다.
그녀는 박기진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 이상한 거요? 어떤...
박기진은 목을 한번 가다듬고 말을 이어나갔다.
- 오늘 아침에 전철역에서 노인을 한 분 만났는데요. 교복을 입고 있었어요...
여매니저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 아, 여자 노인분이죠? 유명한 분이에요. 근처 전철역에 가끔씩 교복을 입고 나타나요. 여기 사시는 분은 다 알 거예요.
박기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 네….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었어요. 아까 그 엘리베이터 노인 분 있잖아요. 그분의 목에 제가 봤던 20대 젊은 남자의 목에 있는 것과 같은 문신을 봤어요…
그녀는 순간 눈을 반짝이며 박기진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입가의 곡선을 유지한 채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
- 음, 그게 무슨 뜻인지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박기진은 그녀의 물음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듯 대답을 이었다.
- 그게… 문신을 한 남자를 아침에 봤어요. 그런 문신을 같은 곳에 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되거든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듯하더니 박기진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이상하긴 하네요. 이 얘기를 다른 사람과도 상의해보았나요?
박기진은 무언가 잘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보제공으로 검사비용을 면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 아니요... 처음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녀는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 음… 얘기가 흥미롭네요. 혹시 모르니 추가조사를 해볼게요.
박기진은 그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함께 차를 마셨다. 조금씩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다 박기진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