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환한 빛이 눈꺼풀을 뚫고 들어왔지만 머릿속은 아직 몽롱했다. 박기진은 고개를 돌려보려 했지만, 목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가운 금속이 목 주변을 감싸고 있었고, 두 팔과 발목 역시 의자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침울한 회색 벽과 삼각대 위의 카메라였다. 조명은 차갑게, 숨소리는 스산하게 고요한 공간 속으로 퍼져나갔다.
박기진이 숨을 고르며 상황을 정리하려 애쓸 무렵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박기진은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일정한 패턴의 발소리가 바닥을 스치며 점점 가까워졌다. 발소리가 잠시 멈춘 순간 등 뒤로 느껴지는 묘한 기운이 온몸에 전달됐다. 뒤에 있는 누군가를 직접 볼 순 없었지만, 등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내 발소리가 다시 움직이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박기진의 오른쪽으로 다가왔다. 박기진은 목덜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 박기진 씨?
높낮이가 없는 메마른 첫마디가 고요함을 깨뜨렸다.
박기진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 눈을 뜨세요.
박기진은 고개를 저으려다 눈을 더 질끈 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음... 저를 안 본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이미 많은 것을 알아버렸으니까.
박기진은 눈을 감은 채 말을 꺼냈다.
-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는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 음... 그런가요?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박기진 씨 주머니에 이런 게 있더라구요.
그는 박기진의 눈앞에 무선호출기를 들어 보였다.
박기진은 실눈을 살짝 뜨고 앞을 쳐다봤다.
- 세상엔 쓸모없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우리 회사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주고 있는데... 가끔 그 기회조차 걷어차버리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쓸데없는 호기심 때문에...
-...
박기진은 말을 뱉지 않고 꿀꺽 삼켰다.
아무 말이 없자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 음... 박기진 씨도 나름 무능력을 증명해서 지원자격을 얻었을 텐데...
그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자신에 찬 어투로 ‘무능력’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그가 박기진을 가르치려는 듯한 느낌을 받자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박기진은 질문을 던졌다.
- 무능력을 증명한다니…?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는 걸 느끼며 살짝 화가 난 듯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그는 양손을 올려 으쓱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 우리 회사의 비전! 누구에게나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준다. 다른 회사들은 너무 쉽게 사람을 뽑고 있어요. 성적이니 외모니 이것저것을 따지고, 입사하고 싶어 이미 줄 선 사람들을 뻔한 기준으로 다시 줄 세우는 방법 말이죠.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 우리 회사는 달라요.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는 회사.
박기진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 웃기지 마! 그냥 돈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모아다가 이용하는 것뿐이잖아!
박기진을 응시하던 그는 아랫입술을 굳게 다물어 올리며 한숨을 한차례 쉬었다.
- 이렇다니까요. 쓸모없는 사람의 쓸모없는 외침. 어쨌든 박기진 씨는 특별한 대우를 해드리려구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말이죠.
박기진은 목소리를 한 톤 높여 대답을 했다.
- 나는 테스트를 안 받겠다고!
그는 갑자기 박수를 치며 활짝 웃었다.
- 맞아요. 원래 받으려던 테스트는 취소했어요. 대신 특별한 테스트로 준비했죠.
그는 눈을 크게 한번 뜨고는 뒤로 돌아가 박기진 어깨에 손을 올렸다.
- 아참! 특별한 기여인 만큼... 높은 확률로...
그 말을 듣는 순간 박기진은 가슴이 철렁하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 아니 그게 무슨! 빨리 이거나 풀어.
그는 박기진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서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 어디까지나 박기진 씨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겁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등 뒤의 발소리가 천천히 멀어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다시금 공간을 채웠다. 박기진은 눈앞의 카메라를 매섭게 노려봤다.
잠깐동안의 적막을 깨고 박기진의 시야에 검은 양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한 명이 말없이 트레이를 들고 다가왔고, 그 위에는 투명한 액체가 든 주사기와 작은 의료용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검은 양복의 그 직원은 의자에 묶여 있는 박기진 앞으로 다가와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는 조용히 장갑을 끼고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박기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고정장치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뭐 하는 거야... 그만둬!
박기진은 목소리를 높였지만, 검은 양복의 직원은 아무 말 없이 그의 팔에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 박기진의 팔을 고정시키고, 다른 손으로 주사기를 가져가는 그의 동작은 매끄럽고 정확했다. 박기진은 눈을 부릅뜨며 그를 노려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사가 박기진의 피부를 스치기 직전, 직원이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 눈 감아
그의 말은 짧고 조용했다. 주사를 놓은 그 직원은 트레이를 치우며, 다른 직원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직원은 카메라 뒤쪽으로 이동했고, 박기진에게 주사를 놓은 직원도 그를 따라가더니 카메라를 만지는 틈에 재빠르게 주사를 목에 찔러 넣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주사액이 투입되자, 찔린 직원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몇 번 몸을 비틀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동료를 흘끗 내려다보더니, 그는 주사기를 트레이 위에 툭 내려놓고 박기진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은 침착하게 박기진의 손목을 묶고 있던 고정장치를 풀기 시작했다.
고정장치가 하나씩 해제되는 동안 안도하는 마음과 함께 의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 누... 구시죠?
그는 마지막으로 발목에 있던 장치를 풀며 짧게 말했다.
- K
- K... 요?
어리둥절하고 있는 박기진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
- 고객안전담당이라고 하면 알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