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표님은 어쩜 볼 때마다 더 젊어지시는 것 같아요.
- 하하. 그런가요? 요새 운동을 시작해서 그런가 봅니다. 젊은이들한테 뒤질 순 없잖아요.
김대표는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대표님, 오늘 저녁 만찬 때 자세히 좀 얘기해주세요.
여자는 눈웃음을 치며 김대표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김대표는 미소와 함께 손목에 반짝이는 은색 시계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 아쉽지만 오늘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다음 기회에 얘기 나누시죠.
김대표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로비를 나와 검은색 차량으로 걸음을 옮겼다.
- 준비는 다 된 건가?
- 네, 대표님. 직접 참관하실 수 있게 준비해 뒀습니다.
넓고 하얀 룸 한가운데 20대 남자와 60대 남자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손발은 의자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고, 그들의 몸은 조명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둘을 가로막은 유리창 너머로 김대표와 한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 상황이 익숙한 듯 지켜보고 있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지만, 창 너머 시선만큼은 유리창을 깨뜨릴 듯 묵직했다.
룸 안에 있던 양복 입은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가더니 60대 남자의 의자 앞에 멈춰 섰다. 그는 한 손으로 주사기를 집은 채 다른 손으로는 남자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60대 남자는 의자에 묶인 채로 미동이 없었다. 그의 숨소리는 얕고 느렸으며, 눈은 반쯤 감겨 흐리멍덩했다.
양복을 입은 남자가 그의 팔에 주삿바늘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바늘이 그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순간, 남자는 미세하게 움찔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투명한 액체가 그의 혈관으로 들어가는 동안 적막함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주사를 놓은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거의 알아채기 어려운 변화였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입술이 천천히 다물어졌고, 초점 없던 눈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잠시 뒤, 남자의 눈꺼풀이 번쩍 열렸다. 흐릿했던 눈빛은 사라지고, 맑고 날카로운 빛이 스며들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도 변화가 감지되었다. 피곤해 보였던 주름진 얼굴이 갑자기 생기를 띠며 활기를 되찾는 듯 보였다. 이마에 얽혀 있던 깊은 주름이 옅어지고, 입가엔 단단한 의지가 스쳤다. 가슴이 오르내리는 움직임은 규칙적이고 숨소리도 안정되어 갔다.
이 광경을 지켜본 김대표가 말을 꺼냈다.
- 이 테스트가 몇 번째라고 했지?
- 열 번째입니다. 열 번 모두 문제없이 동일한 효과를 보였습니다.
김대표는 창 너머 남자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
- 왜 열 번이지?
질문을 들은 옆의 남자는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 대표님께서 열 번 이상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셔서...
김대표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지만 찰나의 순간이라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면 미묘한 변화를 알아챌 수 없었다. 그는 같은 높이의 톤으로 말을 이었다.
- 지금 하는 일이 국가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알고 있을 거야. 단순히 약을 만들어 파는 수익사업이 아니란 것도 여러 번 얘기했고... 국가에 큰 위기가 오고 있어... 몇 세기를 지난 들 다시 나올 수 없는 인물이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만큼 국가에 해가 되는 것은 없지.
김대표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말을 이었다.
- 내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게끔 하는 것. 그것이 국가를 위하는 길이란 말이야.
김대표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지만, 충분한 압박감을 자아냈다.
-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대표님!
김대표는 잠시 고조되었던 기분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리며 얘기했다.
- 자네는 프로야. 그런데... 내가 말한 의미 없는 숫자를 기준으로 테스트를 했다니... 이러면 내가 어떻게 일을 믿고 맡기겠나? 죽으라고 하면 죽을 건가? 생각을 갖고 프로답게...
김대표는 표정에 흥분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위압감 있는 목소리로 다그쳤다.
- 다시 준비하고 보고해 주게.
묵묵히 듣고 있던 그는 꺼내려던 말을 꿀꺽 삼킨 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김대표는 뒤돌아 테스트룸을 떠났다.
김대표가 나간 뒤에도 유리창 너머를 응시하고 있던 그는 어딘가 전화를 걸어 나지막이 말했다.
- 왼쪽은 보류하고, 오른쪽은 절차대로...
박기진은 쓰러진 남자의 양복을 서둘러 챙겨 입었다. 목에 감긴 넥타이를 재빨리 고쳐 매고, 쓰러진 남자의 신분증을 옷깃에 달았다.
복도는 희미한 형광등 빛이 벽을 따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박기진은 머리를 약간 숙이고, 자연스러운 척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가 지나치게 크지 않도록 신경 쓰며, 숨소리마저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K는 한 발 앞서 길을 인도하고 있었고, 복도의 끝에는 다른 직원 두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양복과 ID카드를 단 이들은 스쳐 지나가는 박기진과 K를 힐끔 쳐다봤다. 박기진의 목덜미엔 식은땀이 흘렀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지나쳤다.
그들이 멀어지자, 박기진은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어느 덧 복도 끝쪽의 회색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죠?
- 방금 내가 한 것과 똑같이 하면 돼.
- 제가 주사 같은 건 만져본 적도 없어서 K님이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송판영을 아는 네가 하는 게 나아. 마스크 벗고 신원을 알리고 안심을 시키는 동안 나는 카메라, 보안 쪽을 점검할 테니.
강혁수는 수화기 너머 상대방에게 반쯤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 사장님, 오랜만에 전화하셔서 다짜고짜 무슨 말씀이시죠?
사장은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을 받았다.
- 시치미 떼지 말고 어딘지 얘기해
- 하... 박기진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고, 쥐새끼 한 마리가 들어왔더군요. 영업비밀 훔치려고.
사장님은 이번 기회에 전당포 접고 다른 일 하시죠. 어차피 끝났어요. K에게 의뢰했으니까.
전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강혁수는 전화를 서둘러 끊은 뒤 마치 앞에 누가 있는 듯 벌떡 일어나 전화를 다시 받았다.
- 네, 전무님. 전화받았습니다.
- 지원자를 3배 더 모아 오세요. 특히 스페셜품으로
- 네? 3배를요? 오늘 마무리된 것이 아닌가요?
- 데이터를 더 모아야 합니다.
- 네...우선 알겠습니다.
강혁수는 전화를 끊고 다급히 어딘가로 문자를 보냈다.
[의뢰는 잠시 중단합니다. 작전 중지.]
잠시 뒤 강혁수에게 답문이 도착했다.
[계약 변경은 위약금 2배 지불]
강혁수는 바로 문자를 보냈다.
[계약 변경이 아닌 임시 중단]
다시 날아온 답문은 숫자 하나만 바뀌어 있었다.
[계약 변경은 위약금 3배 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