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당포 문이 삐걱 열리며 기필준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 아저씨... 돈 못 받았어요...
전당포주인은 보고 있던 신문을 접더니 벌떡 일어서 기필준에게 다가왔다.
물어보는 전당포주인의 표정이 미묘했다.
- 어떻게 된 건데?
기필준은 억울한 표정으로 얘기를 꺼냈다.
- 말씀 주신 장소 찾아갔더니 마침 할머니가 계셔서...
인사를 했는데요.
전당포주인은 어서 얘기해 보라는 듯 한발 더 앞으로 다가왔다.
- 인사를 했는데?
- 그런데 아무 말이 없으시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더 인사를 했는데...
전당포주인은 입술을 살짝 실룩거리고 눈꼬리가 올라가며 기필준이 한 끝말을 따라 했다.
- 했는데?
전당포주인의 표정변화를 살피며 기필준은 말을 이었다.
- 한번 더 인사하는 순간 다짜고짜 옆에 있던 바구니를 저한테 던지면서 엄청 욕을 하셨어요.
전당포주인은 오묘한 표정으로 다시 설명을 재촉했다.
- 너가 뭐라고 했는데?
전당포주인의 반응이 어색했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기필준이 대답했다.
- 뭐라고 하긴요. '할머니, 안녕하세요. 전당포에서 왔는데요'라고 했죠.
전당포주인은 갑자기 껄껄 웃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기필준의 어깨를 쳤다.
- 하하하하. 그렇구만! 할머니라고 불렀단 말이지... 그러면 안 되는데...
- 네?
전당포주인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기필준 옆에 다가와 둘만의 비밀을 얘기하듯 귓속말로 작게 얘기했다.
- 할머니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 네? 할머니를 할머니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요?
- 향심네...향. 심. 네.
전당포주인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강조해서 말했다.
기필준은 고개를 뒤로 빼며 전당포주인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전당포 주인의 표정은 장난기가 마구 섞인 모호한 표정이었다.
기필준은 아래입술을 삐죽 내밀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아저씨. 그럼 가기 전에 미리 얘기해 주시지...
전당포주인은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며 훈계조로 얘기했다.
- 너가 자꾸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니까 그런 일을 당하는 거야. 남의 호칭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 그럼 지금 일부러 저 혼나라고 이렇게 하신 거라고요?
전당포주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저었다.
- 아니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는 뭐 그냥 인생교훈 같은 거랄까? 아무튼 다시 갔다 와.
기필준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 다시... 갔다오라구요? 엄청 혼내실 것 같은데... 아저... 아니... 형이 직접 가시면 안 돼요?
- 야. 나는 전당포에서 손님 기다려야지. 어딜 나가.
- 어차피 손님 오지도 않는 것 같은데.
전당포 주인은 손을 들어 때리려는 제스처를 취하며 소리쳤다.
- 뭐 인마. 손님이 언제 올 줄 알고!
기필준은 한 숨을 살짝 내쉬며 밖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전당포주인이 소리쳤다.
- 야! 갈 때 시장 입구에서 쌀 한 말 사서 드리고 와.
서울의 번잡한 거리. 넓은 대로변 한쪽 골목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이름 모를 채소들이 작은 포대 여러 개에 담겨 있었다. 삶은 감자와 군밤 그리고 강원도식 수수부꾸미도 한쪽에 자리를 차지했다.
기필준은 노점 앞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할머니는 무릎에 덮개를 두른 채로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 저...기... 향심네...죠?
기필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할머니는 기필준을 힐끗 쳐다보더니 짧게 대꾸했다.
- 돈주 심부름 왔네?
기필준은 쭈뼛거리며 말했다.
- 아. 전당포에서 왔는데요.
- 기니까 니네 돈주가 시킨 거 아니네?
할머니는 허리를 살짝 숙인 채 천천히 일어서 헐렁한 바지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바지 안쪽에 고이 숨겨져 있던 빛바랜 천 원짜리 지폐가 차가운 햇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돈은 오래되어 구김이 심했지만 한 장 한 장 잘 포개져 있었다.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돈을 조심스럽게 펴며 손끝으로 세어 나갔다.
- 여기.
기필준은 손을 내밀어 돈을 받았다.
그리고 뒤춤에 들고 있던 쌀을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기필준이 쌀자루를 할머니 앞에 내려놓자 할머니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 이기 뭐래? 쌀 이래?
기필준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손을 허리에 얹었다.
- 내래 이런 기 가져오랬네? 쌀은 먹을 만티 있는디 자꾸 이런 걸 왜 가져오네? 내래 굶을까 봐 그러네?
할머니는 입으론 잔소리를 쏟아냈지만 이미 손은 쌀자루 위로 가 있었다. 그녀의 주름진 손끝이 쌀자루를 만지작거렸다.
- 돈주 이놈.
말을 뱉으며 할머니는 쌀자루를 옆으로 끌어당겨 자리 옆에 놓았다.
- 가져왔으니 이번엔 노쿠 가래. 다음엔 절대 이런 거 들고 오지 마래. 알간?
- 네... 할... 향심네...
기필준은 할머니에게 꾸벅 인사하고 뒤를 돌았다.
골목어귀를 꺾으며 슬쩍 고개를 돌려 할머니 쪽을 보았다.
할머니가 찬 바닥에 누워있었다.
전당포문이 벌컥 열리며 기필준이 뛰쳐 들어왔다.
- 큰일 났어요! 할머니. 아니 향심네가 쓰러졌어요.
- 뭐? 어디?
- 병원 아니고 집에...
전당포주인은 기필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래된 회색 시멘트벽과 낡은 철문이 세월의 시간을 알렸다. 자물쇠가 없이 반쯤 열린 철문은 녹이 슬어 군데군데 붉은 흔적이 남아 있었고 밀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방의 천장은 낮아서 손을 뻗으면 쉽게 닿을 정도였다. 천장 구석에는 작게 벌어진 금이 있었고 그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었는지 벽에는 얼룩이 번져 있었다. 한쪽면에 난 작은 창문은 밖에서 들어오는 소음과 무관하다는 듯 옆 건물의 회색 벽만을 마주하고 있었다.
방에 깔린 오래된 장판엔 곳곳에 뜯긴 부분이 보였고 이불은 누렇게 바랜 색이었지만 정성스럽게 개켜져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며 전당포주인이 말을 꺼냈다.
- 향심네, 저 왔어요. 괜찮아요?
할머니는 담요 위에 누워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 돈주 왔네? 밥 먹언?...
- 병원 좀 가시자니까 고집을 부리세요.
- 병원은 무신. 할 거 다하믄 돈은 언제 모으네?
힘없이 핀잔을 주던 할머니는 전당포주인을 바라보며 잠깐 뜸을 들였다.
할머니는 천천히 손을 뻗어 이불밑에서 보자기에 싸인 물건 하나를 끄집어냈다.
보자기는 색이 바래고 군데군데 닳아 있었지만 매듭만큼은 단단히 묶여 있었다.
할머니는 힘없는 손으로 전당포주인에게 물건을 밀었다.
전당포 주인은 아무 말 없이 할머니가 준 물건의 보자기를 풀어보았다. 안에는 돈뭉치와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 어떻네? 잘생겼네? 만나키로 했는데 내래 이제 못 기다릴 거 같언. 이 오믄 이 돈 니가 꼭 전해주래. 향심네라고 찾아 올끼니. 꼭 온다고...
전당포주인이 꼭 잡은 할머니의 거친 손위에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해의 계절은 그렇게 무심히 흘러갔다.
너무 슬퍼 마시오.
어디선가 다시 만날 인연.
모든 걸 두고 가벼운 몸으로
사뿐사뿐 발걸음
덩실덩실 춤추며
아주 오래 전 그날처럼
그렇게 무심히
그리고 편안히
그렇게 가시오.
전당포문이 열렸다.
- 여가 돈 빌려주는 데네? 내래 돈 좀 꿔주라.
- 네~ 손님. 환영합니다. 약속전당포입니다.
- ......
- 맡기실 약속은요?
- 마키 긴 뭘 마키? 내래 돈 빌리러 왔다니.
- 네. 할머니. 약속을 맡기시면 돈을 빌려드린답니다.
- 할머니는 얼어 죽을. 리자 꼬박꼬박 낼 테니 돈이나 날래 빌려주래
- 네, 약속.... 을...
- 약속? 내래 있디. 죽기 전에 만날 사람이 있디. 꼭 만나기로 약속했다니. 됐네? 날래 빌려주라.
- 네... 그럼 고객님 이름은?
- 향심네라고 써노라. 돈 안떼먹을테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