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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기밀

by 공부남주

전당포 문이 삐걱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헐렁한 셔츠를 청바지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바지 앞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였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며 전당포 내부를 의심의 눈초리로 살폈다.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선명했고 짙은 눈썹 아래로 찌푸려진 눈매가 심술궂은 인상을 더 강조하고 있었다.


- 어이. 여기 주인 없나?

낮고 거친 말투에는 묘하게 명령조가 섞여 있었다.


전당포 주인이 책상 뒤에서 고개를 들자 그의 눈길이 주인을 향했다. 걸음걸이는 느릿했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묘한 압박감을 풍겼다.


그는 전당포주인을 쳐다보지 않고 사무실안을 계속 훑어보며 말했다.

- 여기 신고 들어온 물건 없나 보려고 왔어. 물건 좀 봅시다.


전당포주인은 상대방을 위아래로 살피며 물었다.

- 누...구시죠?


남자는 손가락으로 책장 위의 먼지를 훔치더니 다른 한 손으로 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내 펼쳐 내밀었다. 경찰신분증이었다.

- 전당포가 가 좀 휑네. 물건은 다 어디있는 거야?


전당포 주인은 아무 표정 없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 저희는 물건 같은 건 없는데요.


경찰은 주인의 말을 무시한 채 책상 앞에 놓인 책들을 손으로 툭 치며 말했다.

- 당포에 물건이 없다라? 아주 재밌군.


그는 말할 때마다 양쪽 얼굴 근육이 틀어져 심술궂은 표정을 더했다. 말끝마다 의심이 섞여 있었고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전당포 안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 물건은 그렇다 치고. 혹시 물건 맡기러 오는 놈들 중에 수상한 놈 없었어?


전당포 주인은 차분히 대꾸했다.

- 니요. 저희 전당포에는 고객들만 오구요. 경찰이 올 만한 일은 없니다.


경찰은 전당포 주인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코웃음을 치며 뒷주머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 만한 일이 있는지 없는지는 당신이 판단하는 게 아니야. 내가 하는 거지.


그는 전당포 내부를 두어 바퀴 더 돌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며 문 쪽으로 했다. 나가기 전 문 앞에 있는 안내판을 손으로 툭 치며 중얼거렸다.


- 조심해. 내가 냄새하나는 기가 막히 맡거든.


문을 열고 나가면서도 고개를 돌려 전당포주인의 행동을 살펴보는 그였다.


마침 기필준이 들어오며 오는 경찰과 마주쳤으나 가볍게 목례를 하는 기필준을 경찰은

힐끗 보고 지나버렸다.


- 새로 오신 손님인가 봐요.


전당포주인은 손과 고개를 적극적으로 흔들며 얘기했다.


- 니야. 니야. 에이. 퉤 퉤 퉤. 나가자.

- 네? 어딜요?

전당포에 막 들어온 기필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 그냥 따라 나와.

- 늘 고아원 가는 날도 아잖아요. 손님 오면 어떡하구요?

- 따라라면 따라와.

기필준은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고개를 갸웃하며 전당포주인을 따라나섰다.


골목길은 한낮의 소음이 가라앉고 조용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골목 끝자 가로등이 비추는 길가 한편에는 주황색 천막으로 둘러싸인 작은 포장마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천막 위에 걸린 노란 전구는 바람에 흔들리며 빛을 깜빡였다. 전당포주인과 기필준은 천막 한쪽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밖으로는 찬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포장마차 안은 뜨거운 국물과 사람들의 온기로 따듯했다.

은 포장마차 안 동그란 파란색 테이블들 위에는 소주병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묵 국물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한쪽에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 포장마차주인은 들어오는 둘을 향해 인사했다.


- 서오세요.


전당포 주인은 기필준과 함께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기필은 자리에 앉으며 어색한 듯 주위를 둘러봤다. 비좁고 살짝 추웠지만 왠지 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면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은 메뉴판이 매달려 있었고 누렇게 바랜 등이 따스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전당포 주인은 뉴판을 슬쩍 보더니 손을 들어 말했다.

- 모. 기 막걸리 하나. 파전 하나요.


주문을 마친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기필준을 힐끔 보더니 다시 집어넣었다.

막걸리가 나오자 전당포 주인은 하얀 막걸리를 잔에 따랐다.

- 너도 이제 곧 성인이잖아. 같이 술 한잔하자고.

- 에이. 싫어요. 갑자기 웬 술이에요.


전당포 주인은 기필준 앞에 잔을 내려놓았다.

- 야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야. 한번 마셔봐.


기필준은 처음엔 어색해다가 전당포 주인의 말투와 툭툭 내뱉는 농담 함께 점점 포장마차 분위기에 익숙해져 갔다.


- 야. 너 이거 평소에 궁금하지 않았냐?

전당포주인은 살짝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기필준은 파전하나를 입에 가져가며 물었다.

- 뭐가요?


전당포 주인은 턱을 괴고 기필준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고객 약속 중에 어떤 건 계약하고 어떤 건 안 하는지. 그 기준 말이야.


- 안 궁금한데요.

기필준은 냄비 안에서 어묵하나를 빼내며 단조로운 말투로 얘기했다.


- 그래 궁금할 줄 알았어.

- 아니 안 궁금하다고요.

전당포주인은 기필준의 말에는 아랑곳 않고 말 이었다.


- 이건 진짜 나만 알고 있는 영업기밀인데 너가 정말 궁금해하니까 알려준다.

- 영업기밀 같은 거 듣고 싶지 않아요.

기필준은 손사래를 치며 거부의사를 표현했다.


전당포 주인은 기필준의 의견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 요한건 말이지. 누구와의 약속인지야. 자신과의 약속인지. 아니면 타인과의 약속인지.

- ?

안 듣겠다던 기필준이었지만 전당포주인의 다음말을 기다다.


- 자신과 한 약속과 다른 누군가와 약속. 그 무게 전혀 다르거든.

기필준은 전당포주인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약속의 무게... 라...'


- 그러니 너도 명심해. 누군가 자기 스스로 뭘 하겠다는 약속으로 계약하겠다고 하면 일단 거절해야 해.


기필준은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어묵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 그걸 제가 알 필요가 있어요?


전당포 주인은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너가 판단하는게 아니야. 내가 판단하는거지. 낄낄


기필준은 혼자 말하고 혼자 웃는 전당포주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기가 더 오르자 전당포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 늦었다. 내일 보자


포장마차에서 나 전당포 주인은 전당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당포 주변에 서성이는 누군가를 알아채지 못 채.

그리고 퍽 소리와 함께 전당포 주인은 힘없이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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