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출한 옷차림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전당포 안으로 들어섰다. 흙먼지가 묻은 바짓단 밑으로 해진 운동화가 짝지어 서 있었다.
남자는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한 채 고개를 여기저기로 돌리다가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 돈... 돈을 빌려준다고...
기필준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잠시 살핀 후 말을 꺼냈다.
- 혹시... 물건을 맡기러 오셨나요? 죄송하지만 여기는 물건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기필준의 담담한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남자는 여전히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한 채 말했다.
- 야... 약속... 맡길 약속이 있어요.
그의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목덜미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기필준은 약속이라는 말에 남자를 다시 주시하며 물었다.
- 음... 약속이라면 어떤?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발로 바닥을 쓸며 말을 이었다.
- 비... 비밀을 알고 있어요.
- 비밀이요?
- 네... 그... 비... 비밀을 감추기로 약속했어요.
기필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꺼냈다.
- 약속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그런 다짐을 했다는 말씀이죠?
- 아... 아니에요... 다... 다른 사람하고 약속했어요.
기필준은 몇 년 전 정당포주인과 본인이 처음 나눴던 대화를 상기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 누구... 랑 약속하신 거죠?
- 비.... 비밀이에요.
기필준은 한숨을 짧게 내쉰 뒤 다시 물었다.
- 그럼 약속의 내용을 알려주세요.
- 그... 비... 비밀이에요.
기필준은 이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 지금 여기 원래 주인분이 안 계셔서 잠시 제가 맡고 있는 건데요. 말씀 주신 내용으로는 계약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계약이 어렵다는 말에 남자는 움직이던 발을 멈추고 살짝 높은 음성으로 말했다.
- 제... 제가 알아요.
기필준은 바뀐 분위기를 감지한 듯 살짝 상기된 어투로 반문했다.
- 네? 뭘...
아까까지 말을 더듬던 그는 더듬지 않고 분명히 말했다.
- 여기 아저씨를 친 사람이 누군지...
기필준은 눈을 크게 뜨며 남자에게 달려와 양어깨를 잡으며 소리쳤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범인을 안다고요? 그게 누군데요?
기필준의 속사포 같은 질문에 남자는 움찔하며 어깨를 돌려 빼 뒤로 물러섰다.
- 알... 알려줄 수 없어요.
기필준은 남자의 말에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 지금 장난하는 거죠?
- 지... 진짜예요. 그런데 알려줄 수 없어요. 약속이니까.
돈... 돈을 빌려 주세요.
기필준은 분노에 찬 말투로 소리 질렀다.
- 그게 말이 되는!
[3일 전]
- 너가 돈 노리고 범행 저지른 거 맞잖아.
기필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군 채 한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 가만히 있으면 너한테 좋을 게 없다니까. 상황이 너한테 불리하다고. 어젯밤 너랑 있는 걸 목격한 사람도 많고.
기필준은 고개를 들고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 형 좀 보러 가게 해 주세요.
- 그러니까 빨리 자백해. 너도 지금 힘들잖아.
기필준 뒤로 누군가 다가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 풀어줘
기필준을 취조하던 형사는 앞으로 내밀었던 몸을 뒤로 젖히며 어이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 네? 기껏 잡은 용의자를 왜 풀어줘요.
기필준 뒤에 다가온 형사는 담배를 하나 꼬나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 헛다리 짚지 말고 풀어주라고.
취조하던 형사는 다 잡은 토끼를 놓친 표정으로 대꾸했다.
- 도주하면 어쩌려고 풀어줘요. 알리바이도 없고...
뒤에 있던 형사가 앞으로 다가와 기필준 앞에 놓인 서류를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 냄새가 안나잖아!
취조하던 형사는 윽박지르는 형사의 기에 밀려 땅에 떨어진 서류를 주섬주섬 주으며 작게 구시렁거렸다.
- 또 저 냄새타령...
형사는 기필준 옆의 철제 의자하나를 끌어당겨 앉으며 말을 건넸다.
- 나 기억하나?
기필준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어제 전당포에 들어가다 마주친 남자였다.
- 아... 네. 어제 전당포에서...
형사는 기필준에게 담배 한 개비를 내밀며 물었다.
- 평소 의심 가는 사람 좀 얘기해 봐.
기필준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담배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혔다.
- 의심 가는 사람이라니요?
형사는 한쪽 팔꿈치를 데스크 위에 올리고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담배연기를 앞으로 후 뿜으며 말을 이었다.
- 전당포주인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거나...
기필준은 찡그린 표정으로 연기를 휘저으며 강한 어조로 얘기했다.
- 형에게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어요.
형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더더욱 냄새가 나는데...
- 아까부터 냄새라니요?
형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 설명하긴 어렵고! 그 어색한 느낌 같은 거 있잖아. 뭔가 당연하다.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틈... 그 틈 안에서 냄새가 스멀스멀 흘러나온다는 말이지.
기필준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형사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경찰서에서 자신과 대화를 해주는 유일한 사람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 우선 지금으로선 냄새 말고 증거라고 할만한 게 없으니... 어쩐다... 당분간 전당포에서 사람들 좀 살펴봐.
기필준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형사를 고개 들어 쳐다보며 물었다.
- 살펴보라니요?
형사는 이런 쉬운 말도 이해 못 하냐는 투로 말을 뱉었다.
- 전당포 손님 받아야 할거 아니야? 가서 일하라고.
기필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저는 전당포 일 해본 적 없어요. 그냥 잔 심부름만 한 거예요. 형한테 좀 보내주세요.
형사는 피던 담배를 종이컵에 눌러 끄며 얘기했다.
- 얘기 자세히 못 들었어? 됐고. 너는 너 할 일 하는 게 도와주는 거야.
기필준은 고개를 돌려 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 그렇게 말씀하셔도 못 하는 건 못하는 거라구요.
형사는 덤덤하게 기필준의 말을 받았다.
- 그래? 알았어. 그럼 가봐.
기필준은 형사가 준 연락처만 챙겨서 경찰서를 나왔다.
받은 종이에는 '강재철'이라고 적혀있었다.
기필준은 3일 전에 받았던 종이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강형사님, 저 전당포 기필준인데요. 좀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 전당포 일 못 한다더니?
강형사는 전당포를 찾아와 기필준의 설명을 들었다.
- 계약을 약속으로 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계약을 했나?
기필준은 고개를 저었다.
- 서류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리니 내일 다시 오라고 말하고 연락드린 거예요.
- 잘했어. 내일 오면 계약을 해.
기필준은 그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계약해도 줄 돈이 없어요.
- 전당포에 돈이 왜 없어?
- 몰라요. 저는... 돈은...
강형사는 기필준의 표정을 잠시 살핀 뒤 얘기했다.
- 알았어. 돈은 내가 준비해 볼 테니 우선 계약을 해.
다음날 늦은 시각에도 어제의 그 남자는 전당포를 찾아오지 않았다. 기필준은 시계를 흘긋 본 뒤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전당포문이 슬그머니 열리며 그 남자가 들어섰다.
- 경... 경찰이죠?
기필준은 마음속의 분노를 삭이며 대꾸했다.
- 뭐가요?
- 어... 어제 여기 온... 청바지 남자...
기필준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 계약하실 건가요?
- 겨... 경찰한테는 말하면 안 돼요.
기필준은 한숨을 길게 내쉰 뒤 단호히 말했다.
- 사건이 발생한 곳에 경찰이 오든 말든 고객님이 신경 쓰실 일은 아닌 것 같네요. 계약하실 건지만 말씀해 주세요.
그 남자는 시선을 다시 다른 데로 돌리며 말했다.
- 계... 계약할 거예요.
- 계약하려면 다른 건 몰라도 누구와 한 약속인지는 말해야 해요.
그 남자는 책상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 도... 돈은요?
기필준은 책상서랍에 돈이 들어있는 봉투를 꺼내 들며 말했다.
- 돈은 준비되어 있어요. 하지만 계약서에 내용이 충분치 않으면....
그 남자는 돈을 보더니 말을 더듬지 않고 재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 전당포 아저씨요.
기필준은 잘 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 네? 저는 그 비밀을 말하지 않기로 약속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은 거예요.
그 남자는 발로 바닥을 옆으로 쓸며 말했다.
- 네... 그 약속 한 사람이... 전당포 아저씨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