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마차를 나온 전당포주인은 기필준과 헤어진 뒤 전당포로 다시 향했다.
전당포에 도착한 주인은 기필준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수금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지폐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전당포주인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한층 더 짙어진 어둠 속을 나섰다.
기필준이 쥐어 준 목도리와 알싸하게 올라오는 술기운이 겨울밤의 추위를 조금은 잊게 했다.
싸늘한 밤공기가 스며든 가로등은 간헐적으로 깜빡이며 어두운 그림자들을 만들어냈다.
골목 끝에는 가로등 불빛으로부터 자신과 그림자를 어둠 속 깊숙이 숨긴 한 남자가 있었다.
전당포 주인과 거리를 유지하던 남자는 주인이 모퉁이를 돌아 어두운 곳 깊숙이 들어서자
한 달음에 거리를 좁혀 무언가로 머리를 내려쳤다.
퍽!
전당포주인은 균형을 잃고 쓰러지면서도 반사적으로 가방을 움켜쥐었다. 남자는 거칠게 가방을 잡아당기며 상대의 팔을 한번 더 가격했지만 주인은 손에서 가방을 놓지 않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전당포주인은 상대방의 행동과 언뜻 보이는 얼굴에서 어렴풋하게 누군가를 생각해 냈다.
- 어... 여... 영철아.
가방을 잡아당기던 남자는 익숙한 음성에 순간 흠칫하며 계속 주시하던 가방에서 시선을 뗐다.
- 어... 어... 어...
앞에 쓰러져있는 남자가 전당포 주인임을 알아본 남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당포주인은 느슨해진 상대의 팔힘을 느끼고는 가방을 가슴 안쪽으로 당기며 바닥에 손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괜찮아. 영철아. 괜찮아.
전당포주인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면서 상대를 안심시켰다.
- 이... 이...
전당포주인은 당황해하는 남자를 다그치지 않고 부드럽게 얘기했다.
- 너 혹시 돈 필요해서 그런 거야?
남자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전당포주인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본 남자는 더욱 당황하며 말했다.
- 피... 피....
전당포 주인은 손등으로 이마의 피를 훔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 난... 괜찮으니까 너 이거 절대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마. 너랑 나만의 비밀이야. 알았지? 지금은 빨리 집으로 가고 나중에 사무실로 와.
남자는 여전히 눈을 한 곳에 두지 못한 채 얘기했다.
- 벼... 병원...
- 난 괜찮으니까 얼른 가.
어둠 속으로 뒷걸음치며 사라지는 남자를 뒤로 하고 전당포 주인은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 어...
전당포 주인은 몇 발자국 가지 못한 채 의식이 희미해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전당포 건물 뒤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었다. 그는 허름한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었고 주머니 속에는 막 받은 돈뭉치를 꽉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남자의 반대편 건물뒤 그림자 속에서 담배 불빛이 깜빡였다.
강 형사는 천천히 담배를 털어내고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자연스럽게 남자의 뒤를 쫓았다.
남자는 초조한 듯 가끔씩 뒤를 힐끗거렸지만 상대를 놓치지 않을 만큼의 거리만 유지하는 감각이 남다른 강형사였다. 두 시간여가 지났을까?
강형사가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남자는 오래 걸었다. 남자는 낡은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버스로 갔으면 20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에 있는 건물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를 확인한 뒤 강형사는 건물 앞으로 다가가 간판을 보았다.
[ㅇㅇ의원]
강 형사는 짧아진 담배개피를 마지막으로 길게 들이마시고 땅에 던진 뒤돌아섰다.
전당포문이 벌컥 열리며 강형사가 들어섰다.
- 아까 그 남자 계약서 좀 줘봐.
기필준은 강형사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강형사는 계약서를 빠르게 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계약서에 내용이 너무 없는데?
- 약속내용이 비밀이라고 해서...
- 다른 계약서들도 좀 꺼내봐
기필준은 서랍 안에 있는 계약서 뭉치를 꺼내 건넸다.
강형사는 다양한 계약서 안의 내용 중에서도 다른 무언가를 빠르게 찾아냈다. 마치 냄새를 맡는 듯했다.
- 계약의뢰인의 약속상대방이 없는 게 이 약속뿐인데?
- 네... 자기 자신에게 한 약속이라고 해서요...
강형사는 기필준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그래?
기필준은 표정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음... 그건 차차 얘기하고...
강형사는 품속에서 낡은 노트 하나를 꺼내 기필준에게 건넸다.
- 이게... 뭐죠?
- 읽어봐
강형사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 사건이 길어질 모양이니 너는 너가 할 일을 해. 사장답게 말이야.
- 사... 장이라니요?
기필준은 전당포를 나서는 강형사의 뒷모습에서 그가 건넨 노트로 시선을 옮겼다.
[3.21일]
당돌한 녀석이 찾아왔다. 고객을 상대로 이러면 안 되는데... 괜히 오지랖을 부린 건 아닌가 싶다. 나 잘하고 있는 거겠지...
[3.28일]
갑자기 학부형이 되었다. 왠지 어린 시절 내 모습과 겹쳐 보여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내가 좀 봐줘도 되지 않을까... 심부름이라는 좋은 핑계가 있잖아.
기필준은 글을 읽어 내려가며 전당포주인을 만나 있었던 여러 일들을 떠 올렸다. 기필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책상 위에는 눈물이 한 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
기필준... 똘똘한 녀석. 제법 일을 잘한다. 괜찮다면 내가 친형이 되어주고 싶다. 언젠가 전당포 사장이 되어 다른 누군가의 가족이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