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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감춰둔 약속

by 공부남주

기필준은 전당포 운영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새로 고객이 와도 빌려줄 돈이 부족했다. 장부 뒤져보니 기필준이 수금 적이 없는 이 눈에 띄었다. 전당포에서 가까운 곳부터 먼저 가보기로 했다.


적힌 주소장 뒤편 오르막길의 중간에 위치한 곳이었다.

- 계시나요?

뭔가 누를만한 것이 없어 밖에서 소리로 인기척을 내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 아까보다 조금 더 소리를 크게 내어보았다.


여전히 아무 응답이 없어 살짝 열린 문에 기대어 들어보니 작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 마는 듯했다. 문에서 귀를 떼며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자동문인양 끼익 소리를 내며 내리막 쪽으로 이 열렸다.

문 안쪽는 허름한 전구 하나가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벽지와 장판이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 창문에는 바람을 막으려다 만 듯 신문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작은 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간장 종지와 김치 몇 조각 그리고 먹다 만 듯한 밥 두 덩이가 놓여 있었다. 방구석 한편에 아이 둘이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기필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필준은 아이들을 보고는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 아. 밥 먹고 있었니?


기필준이 물었지만 아이들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조금 더 커 보이는 아이가 옆에 아이에게 작게 말했다.

- 거봐. 삼촌 아니잖아.

동생으로 보이는 아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속삭였다.

- 엄마... 언제 와?


서로에게 속삭이며 기필준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기필준은 겸언쩍은 상황에 머리를 긁적이며 문을 닫았다. 시멘트벽과 문의 간격이 안 맞아 위로 살짝 들고 밀어 넣어야 했다.

뒤로 돌아서 기필준은 순간 깜짝 놀랐다. 한 손에 봉지를 여자 퀭한 눈으로 기필준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문을 닫고 나서는 기필준을 바라보는 모양새가 아이들의 엄마인 듯했다.


- 아... 저 약속전당포에서 나왔습니다.

괜한 의심을 받는 듯하여 기필준은 재빨리 자기소개를 했다.

- 처... 음보는데요...

- 네. 여긴 처음 왔는데 전당포에서 일한 지는 꽤 되었어요.


엄마목소리를 들었는지 아이 둘이 문을 살짝 열고 빼꼼히 밖을 쳐다보고 있다.

- 럼... 삼촌이 시켜서 오신 건가요?

- 삼... 촌이요?

- 아... 전당포 주인아저씨를 아이들이 삼촌이라고 불러서요.

- 그럼 그렇다고도 볼 수 있긴 합니다.


여자는 아직 의심을 풀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 그럼 어쩐 일로... 얼마 전에 다녀가셨었는데요...

- 아... 럼 삼촌이 이미 이자를 받신 건가 보네요.

- 이... 자요?

여자는 이자라는 말에 살짝 긴장한 말투로 되물었다.


- 네... 계약하실 때 약정한 이자...

- 저희는 잘 몰라요... 그냥 돈을 빌린 건데...

기필준은 빠르게 머리를 굴며 상황파악을 했다.


- 아... 제가 착각했네요. 이자가 아니라 삼촌이 정기적으로 들려서 고객 안부도 확인하고... 그런 건데...


뒤에서 작은 아이가 불쑥 말을 꺼냈다.

- 그럼 과자 갖고 왔어요?

기필준 뒤돌아 아이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 아... 미안... 오늘은 형이 처음 인사하러 온 거라 빈손으로 왔네. 다음에 올 때는...

기필준은 아이들과 여자에게 대충 인사하고 서둘러 내리막을 내려왔다.


메모장에 적힌 다른 주소지에서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주변에서 상황을 살폈다. 직접 가서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집 앞에 노는 아이들이 맞이하는 사람을 살펴보니 처음에 갔던 집과 상황이 비슷해 보였다.

전당포주인이 기필준에게 심부름시키지 않은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기필준이 전당포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전당포주인이 책상에 뒤로 돌아 앉아 있었다.

- 형! 어디 갔다 왔어요? 저 요즘 혼자 일 하느라 마니 힘들었는데요.

- 그래? 혼자서 고생했겠구나.

- 형답지 않게 저 고생한 거 바로 인정하네요. ㅎㅎ

-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지?

- 네? 전 이제 못해요. 형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인가 봐요. 전 심부름이나 간간히 할게요.

- 아니야. 잘할 수 있을 거야. 난 이제 가봐야 해서.

- 어딜 또 다고 그래요?

-...

- 형 저 좀 봐봐요.

기필준은 전당포주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다가갈수록 전당포주인은 뒷모습만 보인채로 조금씩 멀어져 갔다.

- 형! 어디 가요. 가지 마요.

기필준은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기필준은 형의 모습을 생각하며 전당포 문을 조심히 열었지만 형이 있어야 할 곳엔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기필준은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자만으로는 새 계약을 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문득 계약 만기가 된 것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계약서류들을 찾아 하나씩 만기일을 확인해 봤다.

만기일이 지난 계약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날짜를 보니 기필준이 약속전당포와 계약한 날보다 보름정도 뒤에 계약된 건이었다.



좁고 어두운 골목을 따라가자 허름한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나타났다. 바깥쪽에 나있는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갔다. 문 옆에 낡은 간판 하나가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었는데 어떤 곳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필준은 숨을 한번 크게 내신 뒤 문을 두드렸다.

- . 똑.


안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열려 있어.


기필준이 문을 밀고 들어가자 안에는 싸구려 연기가 자욱했다. 담배 냄새가 잔뜩 배어 있을 낡은 소파 위에는 헐렁한 셔츠를 걸친 사내들이 앉아 있었고 테이블에는 먹다 남은 술병과 카드 패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중 한 명이 기필준을 힐끗 올려다보더니 물었다.

- 뭔데?


기필준은 침착하게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 전당포에서 왔는데요.


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한 남자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뒤로 젖혔다.

- 그래서?


다른 남자들은 피식 웃으며 카드패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기필준은 분위기에 개의치 않고 특유의 무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 약 기한이 만료돼서 돈을 돌려받으러 왔는데요.


그러자 소파 옆에 서있던 덩치 큰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기필준 앞에 서더니 어깨를 툭 쳤다.

-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와.


기필준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 약속한 기한이 만료되었으니 돈을 돌려주세요.


그러자 덩치 큰 사내는 입을 삐죽 내밀며 기필준의 멱살을 잡고 뒤로 밀쳤다.

그의 손에 밀려 한 걸음 뒤로 물러지만 기필준은 꼿꼿이 선 채로 소파를 향해 한번 더 말했다. 그러자 앉아있던 사내 한 명이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덩치 큰 사내를 옆으로 밀어냈다.


- 우린 너하고 계약한 적 없는데? 돈 받고 싶으면 계약 당사자가 와야지.


기필준은 겨진 옷을 가볍게 털고 안쪽에 넣어둔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 제가 계약 당사자나 다름없어요. 계약서도 제가 갖고 있구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내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대충 훑어보더니 말했다.

- 어... 맞네. 내가 계약한 문서.

- 네. 이제 확인하셨으니 돈 돌려주세요.


사내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라이터를 꺼내 담배가 아닌 계약서에 불을 붙였다.

- 뭐 하시는 거예요!

기필준은 계약서를 뺏으려 달려들었지만 옆에 있던 덩치 큰 사내가 가로막았다.

기필준은 소리를 질렀지만 사내는 불붙은 계약서로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계약서를 바닥에 던졌다.


- 자. 이제 계약서 같은 거 없으니 볼일 없지? 돌아가.


기필준은 분노에 차 사내에게 달려들었지만 어디서 날아온 건지 모를 주먹에 복부를 세게 얻어맞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윽...


무릎을 꿇은 기필준에게 다가온 사내가 개를 숙이고 담배연기를 훅 내뿜으며 말했다.


- 새끼사슴...

-...

- 사자가 사냥할 때 새끼사슴을 노리는 이유가 단순히 약해서라고 생각해?

기필준은 아무 말 없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 경험이야. 경험. 어딘가 다른 바람의 느낌. 언뜻 보이는 초원의 색감 차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 모를 감각들. 그것이 사자라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지. 하지만 새끼사슴은 그런 경험이 없거든.

-...

- 좋은 공부가 되었지? 이게 다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잘 새겨...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필준은 벌떡 일어서며 머리로 사내 얼굴을 들이받았다.

- 어쿠...

사내는 코를 감싸 쥐며 뒤로 한두 발짝 물러섰다.


- 이 자식이!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 여럿이 동시에 일어나 기필준에게 달려들어 발길질을 해댔다. 기필준은 바닥에 누워 몸을 수그린 채 속으로 생각했다.


'형... 잘 보고 있어. 나 이대로 안 물러서.'

기필준은 수차례 걷어 차이면서도 소파에 기대 코를 만지고 있는 사내를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언제라도 기회만 되면 다시 달려들 기세였다.

그때 삐걱하며 철문이 열렸다.


- 아우! 썩은 내!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에게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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