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작 그만. 폭행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말하기 싫으면 묵비권인가 뭔가 써도 되고 변호사도 선임하든가 말든가 하고.
코를 잡고 있던 남자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강형사를 향해 걸어왔다.
- 강형사님. 오늘은 또 어쩐 일이세요?
- 어쩐 일은 무슨. 범인들 체포하러 왔지.
- 에이. 오버하신다. 남자들 사이에 뭐 그냥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지. 사소한 다툼 가지고 무슨.
강형사는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기필준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 형사랑 깡패들 사이에 뭐 그냥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지. 사소한 체포 가지고 무슨.
남자는 빨개진 코를 강형사에게 보여주며 친근하게 얘기했다.
- 또 이러신다. 제가 먼저 맞은 거에요. 정당방위라고요.
강형사는 남자에게 눈길도 안주며 대답했다.
- 자세한 건 서에 가서 얘기하자고.
강경한 강형사의 대답에 남자는 자세를 숙였다.
- 강형사님, 한 번만 봐주세요.
- 너 얼굴은 볼 만큼 봤어. 뭘 또 봐.
살짝 수그러든 듯한 강형사의 말투에 남자는 한걸음 다가와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저희가 나름 동네 치안도 맡고 있고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많은데 오늘은 좀 넘어가 주세요.
- 치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냥 넘어갈지 밟고 갈지는 피해자한테 물어봐야지. 어떻게 하면 좋겠어?
강형사는 기필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 돈 받아야 해요.
기필준은 일어나 옷을 털며 얘기했다.
- 그건 좀...
남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끝을 흐렸다.
강형사는 손을 들어 아래로 까딱하며 얘기했다.
- 그럼 빨리 챙겨서 출발하자. 많이 안 챙겨도 돼. 먹을 거랑 입을 거 나라에서 다 줄 거니까.
- 아 참내. 알았어요. 알았어.
기필준은 돈을 챙겨 강형사와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
- 범인은 잡으셨나요?
- 아니. 냄새는 나는데 물증이 없어.
사무실에서 내려오는 계단에서 강형사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 그건 그렇고 계속 이런 식으로 운영할 거야?
- 이런 식이라니요?
- 사장이 여기저기 얻어터지면서 돈 받으러 다니면 사무실은 누가 봐? 같이 일 할 사람을 찾아야지.
기필준은 가타부타 말없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기필준의 뒷모습을 보며 강형사는 연기를 길게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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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필준은 여러 고객을 바쁘게 찾아다녔지만 실제 돈을 돌려받은 건 손에 꼽았다.
. 약속 안 찾을 테니 돈 안 갚아도 되죠?
. 이건 50년짜리 약속이야. 돈 받으러 올 생각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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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포 문이 요란하게 열리고 한 남자가 모자를 벗으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고 헝클어진 머리 밑으로는 땀이 번져 있었다.
- 사장! 어딨어?
기필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툭툭 신발을 털며 다가왔다.
- 사장 어디 갔어? 오늘 돈이 좀 급히 필요한데 한 오십만 원만 당겨줄 수 있어?
- 누구시죠?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 내가 여태까지 돈 빌린 게 몇 번인데 누구냐니. 사장한테 물어봐.
기필준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사장님 안 계시니 맡기실 약속 없으시면 나가주시죠.
- 야...
남자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모자를 고쳐 쓰더니 문을 벌컥 열고 나가버렸다.
전당포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기필준은 한숨을 내쉬며 기존 장부들을 살폈다. 사무실에 있는 날에는 이런저런 고객들이 하루에 몇 번씩 찾아왔다.
‘이 돈은 내 돈이 아니야. 아무나 마음대로 빌려줄 수 없어’
전당포 문이 조용히 열리고 잘 다려진 회색 코트를 걸친 한 남자가 차분한 걸음으로 안에 들어섰다. 구두는 먼지 한 점 없이 반짝였고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겨져 있었다. 억지로 꾸미지 않은 고급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왔다.
기필준은 낯선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남자는 천천히 기필준 앞으로 걸어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 안녕하십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상담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기필준은 잠시 남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 앉으시죠.
남자는 코트 안주머니에 있던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기필준에게 건넸다.
- 약속을 맡기고 돈을 빌려준다고 들었습니다.
기필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시했다.
- 그렇다면 맞게 잘 찾아왔군요. 제게 정말 소중한 약속이 있거든요.
- 어떤... 약속이시죠?
남자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 국민들을 위한 약속입니다.
그는 기필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덧붙였다.
- 정치란게 아무래도 돈이 좀 들더군요.
기필준은 남자의 태도에서 어떠한 허세나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자 조금씩 대화를 이어나갔다.
- 얼마나 필요하신 거죠?
- 글쎄요. 얼마나 가능할까요?
기필준은 그동안 모아 놓은 금액을 눈으로 확인한 뒤 물었다.
- 저희는 약속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매월 이자가 있습니다.
- 물론이죠. 이 돈도 결국 국민의 돈 아닙니까? 국민을 위해 이자는 당연히 내야죠.
남자는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서류에 깔끔한 필체로 서명을 남겼다. 거래를 마친 뒤에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 좋은 저녁 되십시오.
그는 다시 한번 공손하게 인사한 뒤 우아한 걸음으로 전당포를 떠났다. 이제야 겨우 제대로 된 계약을 했다고 생각한 기필진이었다. 하지만 속았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행은 한 번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 여기 고아원인데요. 사장님 계시나요? 좀 오셔야 할 것 같아요.
개발의 바람은 도심 곳곳에 불어왔다. 대규모 단지개발로 인한 영향에서 고아원부지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여기에 전당포 고객의 소중한 약속이 있어.'
전에 형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고아원에 가서 한 아이를 사무실로 데려왔다. 아이의 손에는 더 작은 아이의 손이 함께였다.
- 동생이라고 했지? 동생 이름이 뭐야?
- 희진이요. 김희진.
- 그래... 얘들아. 배고프지? 우선 밥부터 먹자.
처음엔 며칠만 봐주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이들은 전당포 안에 머물렀다. 어느새 신발장에는 작은 운동화가 나란히 놓였고 주머니에서는 사탕 껍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늦은 오후 전당포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
안으로 들어선 건 한 젊은 여성이었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묶은 듯했고 걸친 외투는 얇고 낡아 추워 보였다. 손에는 작은 가방이 들려 있었고 그 손끝은 어딘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필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 어서 오세요.
여성은 문을 닫으며 주위를 한 번 훑어보았다. 가게 안에 다른 손님은 없었고 기필준과 아이 둘 뿐이었다. 그녀는 안심한 듯 가방을 꼭 끌어안고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 저기… 혹시 돈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목소리는 작았지만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기필준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 맡기실 약속이 있으십니까?
그녀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얘기를 꺼냈다.
- 아이를 찾아야 해서요. 아이를 꼭 찾기로 약속했는데...
그녀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 많은 금액은 어렵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여성은 기필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네, 괜찮아요. 조금만 있으면 돼요.
기필준은 서류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여성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에 이름을 적었다.
그때 뒤에 있던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거짓말...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기필준은 뒤를 돌아봤다.
- 뭐라고?
- 거짓말이에요.
순간 여자의 표정에 당혹감이 비쳤다.
기필준도 당황하며 얘기했다.
- 희진아.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야.
- 거짓말 맞아요. 우리 엄마가 나 버리고 갈 때 표정과 똑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