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럼 계약서 가져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계약서를 꺼내는 기필준을 향해 김희진이 옆에서 눈치를 주었다.
기필준은 김희진의 매서운 눈빛을 느꼈는지 고객에게 말을 바꿔 양해를 구했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내부 심사가 있어서 따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객이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김희진이 따지고 들었다.
- 그런 모호한 내용을 믿고 또 덜컥 계약하려고 하면 어떡해요?
- 모호하다니? 이 정도로 상세한 내용이 뭐가 모호해?
- 사장님은 주로 계약이 완료된 것들만 보니까 계약이 되지 못한 것들과의 차이를 못 느끼나 봐요.
- 하...그게...
- 보세요. 제가 계약하지 않은 서류들을요. 그냥 좀 힘들어 보인다고 막 계약해 주면 결국에는 꼭 필요한 사람들하고 계약을 못 한다구요.
-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게 무슨 의미지?
- 말 그대로 돈이 꼭 필요한 사람이요.
- 필요하지 않은데 돈 빌리러 오는 사람이 있어?
- 그런 의미가 아니고...
답답하다는 듯 무언가 말을 쏟아내려는 희진을 향해 기필준이 손을 들었다.
- 알어 알어. 네가 일 도와준 다음부터 전당포 경영도 많이 나아졌고. 그런데 말이야...희진아.
설교를 시작하려는 기필준을 향해 희진도 손을 들었다.
- 알아요. 알아. 사람일이라는 게 그렇게 자로잰 듯 딱 계산되는 것이 아니니 저도 바깥세상 돌아가는 걸 좀 알아야 된다는 거죠?
서로를 향해 손을 들고 있던 둘은 알듯 말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치했다. 먼저 대치를 끝낸 건 기필준이었다.
-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말 나온 김에 세상 구경할 겸 심부름 좀 다녀오고.
- 이럴 줄 알았는데... 괜히 또 간섭한 제가 바보 멍청이...
투덜투덜 거리며 사무실을 나가는 김희진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며 기필준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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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국밥집 안 낡은 목재 테이블에는 갓 말아낸 국밥에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저마다의 얘기 속에 진한 국물냄새가 뒤섞였다.
김희진은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 아주머니. 저 왔어요.
- 그놈 또 직접 안 오고 니한테 맡겼어? 이 놈이나 저 놈이나. 한심한 남자 놈들. 으이구. 너도 밥 안 먹었으면 한 숟갈하고 가.
- 전 괜찮아요. 근데 밖에 들어오면서 보니까 최근 더 소란스러워진 것 같네요.
- 말도 마러. X 것들이 허구한 날 찾아와서는. 아휴
한때 손님들로 북적였을 국밥집 앞은 이제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
가게 위로 걸린 낡은 간판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철거 예정”, “출입 금지”, “정리 협조 바람” 같은 문구들이 붉은 글씨로 지저분하게 적혀 있었다.
길가에는 공사용 도구들이 널브러져 있고 비계용 강관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대충 쌓여 있었다. 그리고 공터 한쪽에는 커다란 철제 컨테이너가 놓여 있고 그 위로 [안전제일]이라는 글자가 떡하니 붙어 있었다.
공사장 인부들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한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몇몇은 가게를 힐끗거리며 손짓을 하기도 했고 몇 명은 서류더미를 들여다보며 무언가 논의를 하고 있었다.
가게 문이 벌컥 열리며 검은 점퍼를 입은 용역 직원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주방에서 밥을 뜨고 있던 국밥집 주인 아주머니가 앞으로 나섰다.
- 이것들아. 나는 한 발짝도 못 나가니 국밥이나 실컷 처먹고 가던지 해라.
하지만 용역 직원들은 단호했다.
- 우리도 명령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상황을 살펴보던 김희진이 옳다쿠나 참견했다.
- 이렇게 어깨들 데리고 오면 아주머니가 눈하나 깜짝할 줄 알아요?
김희진은 두 손을 허리에 올린 채 나름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용역직원 여럿이 김희진 앞으로 다가왔다.김희진의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물러설 그녀가 아니었다.
이때 뒤에서 안전모를 쓴 한 남자가 무리들을 제치고 들어왔다. 딱 봐도 우람한 어깨에 건장한 체격이 한주먹 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들어온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손짓을 하며 용역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김희진은 조금 흥분한 채 밖으로 조심스레 따라나섰다. 무섭긴 했지만 대낮이라는 상황과 사장과의 썰전으로 쌓인 스트레스가 그녀를 이끌었다.
- 저기요. 힘 좀 쓴다고 그냥 막 밀어붙이겠다는 거예요? 여기가 몇십 년 된 가게인지는 생각도 안 해봤어요?
남자는 처음 보는 여자가 따라 나와 다짜고짜 따지자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대꾸했다.
- 아... 여기 철거 날짜가 정해져서요. 저희도 그냥 맡은 일하는 사람들인데...
- 일을 맡았다고 생각도 안 하고 막 밀어 붙이냐구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점잖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 생각은 해봤죠. 하지만 감정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고. 법적으로 철거 확정됐고 우린 그에 따라 움직이는 건데...
김희진은 너 잘 걸렸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 법적으로 정해졌다고 다 옳은 건 아니에요. 여기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냥 나가라고 하면 그 다음은요?
남자는 깊게 한숨을 쉬며 바지 주머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 이거 보시겠어요? 철거 후 재개발 계획까지 다 나와 있어요. 나가면 보상도 받게 되어 있고요.
김희진은 서류를 흘끗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 보상? 그게 현실적으로 이분들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생각이나 해봤어요? 돈 몇 푼 쥐여준다고 이 사람들이 수십 년 정든 터를 떠나 갑자기 다른 곳에서 장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 그래서 부탁드리는 건데...
김희진의 목소리가 조금 더 단호해졌다.
- 당신들은 여기서 국밥 한 그릇이라도 먹어봤어요? 하루 종일 일하다가 이 국물 한 그릇에 겨우 숨 돌리는 사람들 마음을 단순한 철거 작업으로만 보고 있는 거냐고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조금 뒤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접었다.
- … 아무튼 우리도 오늘 당장 뭘 하려고 온 건 아닙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어요. 대책을 마련하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김희진을 향해 물었다.
- 그런데 혹시 여기 국밥집 아주머니랑 무슨 관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김희진은 처음부터 줄곧 공손한 상대의 태도에 조금은 억양이 수그러 들었다.
- 자세히 알 건 없고 그냥 아는 사이예요. 당신은 깡패두목이에요?
김희진은 깡패두목이라는 단어를 꺼냈다가 흠칫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상대남자는 안쪽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김희진에게 건넸다.
- 제 명함입니다. 시간 되실 때 상황을 자세히 말씀드릴 테니 연락 주세요. 여기 아주머니는 저희말을 아얘 안 들으시려고 해서...
김희진이 명함을 받는 사이에 아주머니가 주름진 손으로 앞치마를 만지며 가게 밖으로 나왔다.
- 뭐혀. 장사 방해할라믄 얼른 썩 꺼져.
남자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뒤돌아섰다. 남자를 한참 바라보고 있던 김희진은 혀를 차는 소리에 아주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저 칠푼이. 쯧쯧
- 칠푼이요?
- 저 사내놈도 칠푼이여. 일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놈이.
- 일을 못해요?
- 물러터져 가지고. 저렇게 말로만 해서 어디 누가 꿈쩍하겄어.
- 오늘 보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뭔가 하려는 거 같은데요?
- 본격은 얼어 죽을... 와서 저렇게 부탁만 하고 간지가 언젠데.
- 언제부터 왔는데요?
- 몰러. 못해도 반년은 됐을겨.
- 부탁만 하고 돌아가는 걸 반년을 하고 있다구요?
김희진은 다시 한번 남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그가 건넨 명함을 보았다.
[이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