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은 분주함보다는 냉랭함이 가득했다. 벽에는 공사도면과 일정표가 붙어 있고 바닥에는 관련 서류가 흩어져 있었다.
한 남자가 창밖을 주시한 채 이도영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조금만 더?
-...
남자는 이도영에게 천천히 다가오더니 갑자기 구둣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 1억! 5억! 10억!
금액을 한 번씩 외칠 때마다 정강이를 걷어찼지만 이도영은 표정변화 없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지금 너 때문에 손해가 얼마인지 알아!
남자는 손가락을 들어 이도영을 향해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 용역을 쓰는 이유가 뭔데? 이런 껄끄러운 거 해결하라고 쓰는 거 아니야. 그런데 여태 설득을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남자는 이도영의 무표정에 지친 듯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 그 잘난 인정으로 철거민들 사정 다 봐주고. 참내. 너한테 월급 주는 분들 사정은 왜 안 봐주는데? 봐줄 거면 둘 다 봐줘야 되는 거 아니야? 너가 뭔데? 너가 책임자야?
이도영은 고개를 들지 않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 책임질 수 없으니까... 스스로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합니다.
남자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 성인군자 납셨네. 그동안 오냐오냐 좀 봐줬더니... 일을 시켰으면 시킨 대로 하라고 좀!
남자는 담배를 두어 모금 빨다 아직 많이 남은 장초를 비벼 끄며 입을 열었다.
- 넌 손 떼. 내일 철거 들어간다.
그동안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던 이도영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 내일이요?
남자는 자리에 앉더니 전화 수화기로 책상을 툭 치며 말했다.
- 나가봐.
이도영은 말을 꺼내려다 말고 뒤돌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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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네... 전에 상황을 설명해 주신다고...
조명아래서 보니 이도영의 이목구비가 더 뚜렷이 보였다.
이도영은 김희진 쪽으로 몸을 숙이며 말을 꺼냈다.
- 죄송합니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상황설명보다 먼저 이유라도 알 수 있을까요?
- 네? 이유요?
- 네. 완강했던 분들도 보상금액 들으면 대부분 수긍을 하시는데... 아주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으셔서...
김희진은 이도영의 눈빛과 표정에 집중하고 있다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 서둘러 대답했다.
- 아... 네. 네... 가게가 물려받은 유산이에요. 가게를 꼭 지켜달라는 약속. 그 약속으로 저희와도...
어느새 고객 얘기를 자세히 하고 있는 자신을 눈치챈 뒤 김희진은 뒷말을 흐렸다.
김희진의 당황한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도영은 고개를 숙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돈으로는 해결이 안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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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집 앞에는 이미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용역업체 직원들이 검은 점퍼를 맞춰 입고 가게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철거 일정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리는 듯 공사 도구와 안전띠가 가게 주변을 감쌌다.
국밥집 아주머니는 문 앞에 서서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 이것들아! 안 된다! 여기는 절대 안된다!
그러나 앞장선 용역업체 직원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 아줌마. 몸이라도 성하려면 비키쇼. 난 사정 같은 거 안 봐줘.
그 순간 가게 안에서 누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도영이었다.
- 아주머니가 안된다고 하잖아.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용역직원들은 가게 안에서 나온 이도영을 보고 흠칫 놀랐다.
- 형님...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빠진 거 아니었어요?
- 그냥 내 할 일 하는 거야.
앞에 나와 얘기하던 직원은 고개를 숙여 땅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 형님... 적당히 하세요. 적당히.
- 적당히?
- 뭔 되지도 않는 정의의 사자인척 하세요.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잖아요.
- 아니. 아직 할 만큼 안 했는데.
직원은 이도영을 향해 한숨을 쉬더니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 저도 할 만큼 했습니다. 저 원망 마세요.
- 너 원망을 왜 하냐. 너도 너 할 일 하는 건데.
앞장선 직원이 뒤로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선뜻 앞으로 나서려 하지 않고 눈치만 봤다. 그때 뒤쪽에 서 있던 덩치 큰 젊은 직원 하나가 이도영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 뭔데 혼자 개폼을 잡고 있어!
다가온 덩치는 이도영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이도영이 한 발짝 뒤로 밀려날 정도로 큰 충격이 옆구리를 강타했다.
- 어쭈! 맷집이 좋네?
이번엔 주먹이 이도영의 턱에 날아왔다. 퍽!
이도영은 입안에 피맛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침을 한 움큼 뱉었다.
그러고는 자세를 취했다. 발을 단단히 고정하고 상체를 살짝 숙이며 무게 중심을 잡았다.
- 이제부터는 나도 정당방위야.
덩치가 다시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이도영은 가볍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고 그대로 팔을 뻗어 상대의 손목을 낚아챘다.
손목을 비틀며 힘껏 밀어붙이자 육중한 무게의 직원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쿵하고 쓰러졌다.
뒤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주춤하며 다가왔다. 주먹이 날아들었지만 이도영은 고개를 살짝 숙여 피하며
주먹을 상대의 복부에 강하게 날렸다. 직원은 신음을 내뱉으며 무릎을 꿇었다.
이도영은 느긋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일 끝난 사람은 빨리 퇴근해.
웅성웅성거리는 사람들 뒤로 직원 하나가 공사 장비 옆에 놓인 쇠막대를 움켜쥐었다. 몰래 다가온 그는 이도영을 향해 쇠막대를 힘껏 내리쳤다.
퍽!
쇠막대에 등을 맞은 이도영은 순간 비틀거렸고 때를 놓치지 않고 여러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주먹과 발길질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이도영은 몇 번이나 쓰러질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지만 다수 앞에 장사 없다고 했던가. 체력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가게 앞 바닥에 무너졌다.
온몸이 욱신거렸고 입안에서 피맛이 진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다가와 그의 멱살을 잡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몸이 축 늘어졌지만 이도영은 마지막까지 흐릿한 시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도영은 피투성이 얼굴로 희미하게 웃으며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 알지? 어설프게 할 거면 안 하는 게 나아.
남자는 그 말에 움찔하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때 국밥집주인이 이도영의 몸을 감싸 안았다.
- 됐다. 내가 나갈 테니 이 한심한 놈 좀 그만 내버려 둬.
이도영의 몸이 무겁게 바닥으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