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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오 Feb 02. 2023

취향은 쉽게 변하지 않아

내 취향의 일관성을 깨달은 날

어느날 집 근처 백화점에 즉흥적으로 가서 포인트 적립되는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내 생애 최초의 신용카드였다. 카드를 만든 계기는 매우 간단했다. 백화점에서 가전제품을 사게 되면 가전제품은 비싸니까 할부를 이용하고, 포인트 적립을 받기 위해서였다. 백화점 말고 다른 곳에서의 결제 대금이 매월 얼마 이상이면 백화점에서 산 물건값을 15%나 후불 할인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작은 글씨로 깨알같이 '월 최대 3만원'이라는 문구가 있었지만, 나는 이미 15% 라는 문구 앞에서 최면에 걸려 버린 상태였다. 한 달만 백화점 아닌 다른 곳에서 사용하고, 그 다음달에 백화점에 와서 가전제품을 사면 얼마나 이득인가! 이런 생각에 이미 내 손은 카드 발급을 위한 서명을 쓱쓱 하고 있었다. 


카드를 만들자 써보고 싶어졌다. 저렴한 물건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전제품 매장을 둘러보았다. 그 곳에는 휘황찬란한 물건들이 즐비했다. 백화점이니 오죽 잘 전시를 해 놓았겠는가. 보기만 해도 혹할 디자인과 멋진 기능을 가진 가전제품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그중 전자렌지를 살펴보았다. 오븐기능, 에어프라이어 기능, 토스트 기능까지 다 들어있다는 국산 제품에 눈이 돌아갔다. 하지만 50만원이 넘는 가격표를 보자, 나가버린 내 정신은 곧바로 머리 속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수입 가전제품 매장으로 가보았다. 거기에는 베이킹을 하면 정말 빵이 잘 구워진다는 오븐이 자리잡고 있었다. 오호! 하면서 멋진 디자인에 감탄하며 카드를 만지작거리다 또다시 가격표를 보고는 정신을 붙들어 매었다. 지금은 이걸 지르면 안 되었다. 이제부터 아파트 관리비도 내야하고, 사야할 물건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어림잡아도 몇 백만원이 들 예정이었는데, 거기에 오븐같은 사치품(?)을 장만할 수는 없었다. 

1인가구인데 빵을 구워봤자 몇 번이나 구워먹겠는가. 아니지, 사다 놓자마자 장식품이 되어 인테리어 제품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되겠다, 차라리 옷 매장을 가보자! 하는 생각에 층을 바꿔서 의류 매장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럴수가! 세일을 평소 잘 안하던 브랜드가 세일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이때다 싶었는지 평일이었는데도 몇몇 여성 고객이 매장 안에서 옷을 고르고 있었다. 이에 질세라, 하며 나도 매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약 20분이 지났다. 그 시간동안 나는 몇번이나 옷을 바꿔 입어보고는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직원이 추천해주는 블라우스, 치마, 자켓을 한 벌씩 집어 들었다. 그 상품들은 모두 인터넷으로도 잘 팔리는 인기상품들이라고 했다. 세 가지 품목의 가격을 모두 더했는데도 합산 가격은 10만원이 채 넘지 않았다. 기분 좋게 새로 만든 신용카드로 사샤삭 결제했다. 집으로 옷을 들고 룰루랄라 와서 택부터 떼어냈다. 그리고 어제 기사 아저씨 덕분에 설치한 행거로 다가갔다. 옷을 한 벌씩 옷걸이에 넣고 행거에 거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뭐랄까,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되는 물건을 본 것같은 느낌이었다. 


자세히 보니, 집에 이사오자마자 인터넷 쇼핑으로 시킨 옷들이 걸려있었다. 그런데 그 옷들 중 방금 사온 옷들과 겹치는 '옷들'이 있었다. 디자인과 색깔, 브랜드까지 일치하는 두 벌의 옷들! 어쩐지 맘에 든다 했더니 인터넷으로도 보고 맘에 들어서 산 옷들이었던 것이다. 똑같은 블라우스들과 치마들을 보며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신용카드를 써본다는 생각에 똑같은 물건을 또 사면서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내 취향의 일관성은 또 다른 구매 내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예쁜 의자를 샀는데 거실에 놔야 했다. 그래서 의자를 끌거나 하면 층간 소음이 생길테니, 의자 다리에 양말(?)을 씌워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근처 마트로 가 의자 다리에 씌울 양말(?)을 찾아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의자의 색깔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히 투톤이었는데....하면서 하는 수 없이 제일 예쁜 색깔의 양말(?)을 사왔었다. 그냥 안 어울리더라도 쓰지 뭐, 하는 생각으로 사온 물건이었는데 집에 와 보니 양말(?)의 색깔과 의자의 색깔이 비슷한 계열로 무척 잘 어울리는 거였다. 


역시, 사람의 취향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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