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일기
연말을 앞두면 으레 초조하고 설레기 마련이다. 하지만 작년 12월 말은 달랐다. 답답했다. 돌파구, 비상구, 분출구, 그런 게 필요했다. 매년 새해 목표로 적었던 ‘영어 공부, 운동, 저축, 나를 사랑하기…’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다짐이라고 느꼈다. 나는 뭔가를 치고 싶었다. 그게 무엇을 향한 마음인지는 잘 몰랐다.
하루하루는 지나가고 있는데 나는 제자리 같고, 주변 사람들에게 괜한 미움을 품고, 마음은 점점 곪아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내가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삶이 나를 끌고 가는 것 같았다. 에너지를 다른 곳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생각은 전혀 들지 않게 몰두할 수 있고, 몸을 쓰는 일이라 지쳐 곯아떨어지는 운동. 복싱을 해보면 어떨까. 멋있어 보일 수 있다는 동경도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4년 전에 2주 정도 배운 전적도 있다. 가족과 친구들이 놀랐다. 체구도 작고, 행동과 생각도 느리고, 무엇 하나 제대로 때리지 못할 것 같은, 오히려 얻어맞을 것 같은 사람이 복싱이라니.
아무렴 상관없었다. 나는 바로 복싱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집 근처에는 두 곳의 복싱장이 있었다. 한 곳은 세련된 인테리어에 다양한 시설 장비가 있는 ‘A 펀치’ 복싱장이다. ‘A 펀치’는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갖췄다. 스마트 워치를 찬 10명의 사람들이 다 함께 복싱을 배운다. 복싱뿐만 아니라 유산소와 근력운동, 식단까지 관리해 준다. 그야말로 원 펀치에 쓰리 칼로리가 빠질 것 같은 곳이다.
다른 복싱장은 평범한 이름의 ‘B 복싱장’이다. ‘B 복싱장’은 집에서 더 가까웠다. 운동은 집에서 가까운 곳을 다녀야 한다는 철학이 있었지만 내부 사진도 없고, 후기도 몇 되지 않아 망설여졌다.
나는 두 복싱장 후기를 샅샅이 살펴봤고 ‘B 복싱장’으로 결정했다. 지역 카페에서 ‘관장님이 친절해요. 우리 아이들이 좋아해요’라는 댓글을 봤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재밌게 다니는 복싱장이라면 나도 괜찮지 않을까. 무엇보다 너무 세련되고 체계적인 복싱장은 내가 상상하던 곳이 아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까지 운동하고 싶진 않았다.
관장님은 신입회원 등록은 마감이라고 했다. 역시 연말이구나. 하지만 낮이나 이른 저녁에 오면 운동을 봐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언제든 올 수 있기에 괜찮다고 했다. 회원 등록서에 복싱을 하고 싶은 이유와 몇 가지 인적 사항을 적었다. 목표는 … 체력 증진, 운동 가능한 요일은 … 월화수목금, 직업은 … 아직 대학생이지 뭐, 나이는 … 왠지 내 나이가 아닌 것 같았다. “언제부터 나오실 수 있어요?” “내일이요”. “네, 그럼 내일 오세요”. ”네, 내일 뵐게요.” 1층까지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설렜다. 새로운 도전이었고, 꽤 멋져 보였다. 무엇보다 내일부터 매일매일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됐다. 이미 난 다른 사람이 됐다.
보너스 운동일지
2022.12.29 복싱일기
이틀 차인데 벌써 관장님이 설명을 안 해준다. 하지만 알아서 척척… 이제 뭐 하면 되냐고 여쭤봤다. 스트레칭 영상 보고 따라 하기, 하프 짐볼 위에서 뛰기 100번, 아킬레스건 스트레칭 기구 20초 버티기, 비스듬히 서 있는 상태에서 막대 잡고 팔굽혀펴기 10번씩 3세트, 러닝머신 10분, 줄넘기 50개씩 3세트 가 끝나면 장갑을 끼고 쨉쨉을 연습한다.
오늘은 스텝을 뛰었다. 정자세로 한쪽 팔만 뻗다가 스텝 뛰니까 더 엉성하다. 편집 수업에서 교수님이 나보고 리듬감이 없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느꼈다. 팔 정확하게 쭉 뻗기 은근 어렵다. 그리고 계속하다 보면 백신 맞은 느낌이다.
요가와 확실히 다르다. 요가는 지금 여기 내 몸과 마음을 느끼는 훈련이지만, 복싱은 지금 여기 내 몸과 마음이고 뭐고 일단 뛰어! 일단 뻗어! 일단 일어나!에 반응할 뿐이다.
그래서 끝나면 개운하다. 요가는 더욱더 내가 되는 차분한 기분이지만, 복싱은 나를 잊고 나를 둘러싼 환경도 잊고 단순해진다. 1시간 전 나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 집에 돌아간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느끼는 건 크게 두 가지다. 아마 운동은 이런걸 깨닫게 만드는 것 같다.
죽도록 힘들어도 언젠간 끝난다.
분명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낫다.
* '권투를 빌어요'는 '건투(健鬪)를 빈다'를 권투적 허용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의지를 굽히지 않고 씩씩하게 잘 싸운다'는 뜻은 건투(健鬪)가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