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것 같지 않은 긴 겨울도 풋풋한 봄의 두드림에 옷자락을 접고 있다. 융릉과 건릉 사이의 보슬보슬한 흙길을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세월을 머금은 노송 사이에서 솔 내음이 피어오른다. 겨울 공기와 다가오는 이른 봄의 입김이 교차하며 만들어진 향기는 어린잎처럼 싱그럽다.
오랜만에 만난 순영이와 봄맞이를 하다 보니 서로가 지나온 인생의 겨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풀려 나온다. 처음으로 순영이의 이혼과 재혼 과정을 자세히 듣고 보니 인생이란 누구라도 폭풍과 우박이 떨어지는 숲을 거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순영이는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다. 키 순서대로 출석번호를 정했던 시절 그녀와 나 그리고 다른 친구 한 명, 고만고만한 우리 셋은 늘 붙어 다녔다. 바람 부는 날 초록색 체육복을 입고 활짝 웃으며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인생의 고통은 잠시도 우리 곁에 머물지 않고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나는 그때 그녀를 세상에서 교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의 창의적인 사고와 자율성을 억압한다는 이유로 사라진 검은 교복은 순영이의 단발머리와 함께 내 머릿속 사진관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말수도 적은 그녀는 아니, 응, 그랬어, 정도의 말만 서툰 연주자의 바이올린 소리처럼 떨며 작게 했다. 그래도 그런 그녀와 있으면 초록 들판에 하얗게 올라온 크로버 꽃 옆에 있는 것처럼 기분 좋고 편안했다.
몇 년 전, 오랜만에 만나서 들은 재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은 외할머니 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가족과 조촐하게 결혼식을 한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축하한다는 말은 했지만 마음속에는 순영이 아들에 대한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몇 번이나 임신한 아이를 잃고 오랫동안 아기가 생기지 않다가 어렵게 얻은 생명인데.
시댁 식구들이 준 상처를 더 이상 참기 싫고 지금 결혼할 사람하고 있으면 행복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이 공감이 가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에 순영이의 첫 번째 결혼식 모습이 떠올랐다. 교복이 잘 어울렸던 순영이는 원삼 족두리도 잘 어울렸다. 볼록한 이마와 두 볼, 날카롭지 않게 오뚝한 콧날과 붉은 입술이 담장에 핀 능소화처럼 단아하고 예뻤다. 연지, 곤지를 찍으니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였다. 알록달록한 색깔로 족두리 위에서 반짝이는 구슬과 장식은 결혼 생활에 펼쳐질 아기자기한 행복처럼 반짝거렸다. 까만 머리 위에 차분하게 올라앉은 족두리를 보며 저것을 영원히 내려놓지 말고 한복 모델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순영이는 아직도 버들가지, 코스모스 같은 말들이 어울리는 마르고 날씬한 몸매에 목소리도 여전히 작고 가늘다. 영원히 연약하고 순진한 모습으로만 있을 것 같더니 사업을 하며 세상을 사는 지혜를 배운 그녀는 강한 여자가 되었다.
결혼 후 남편의 분노조절 장애를 겪으며 신경쇠약 때문에 약을 먹은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극복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