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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벽에 피어난 가장 따뜻한 풍경

- 벽화 그리기 완성

by 이안정

한때 이곳은 그저 낡고 침묵하던 벽이었다.
시간이 벽을 지나가며 남긴 것은 갈라진 틈새와 빛바랜 흔적뿐이었다.
햇빛이 스쳐도 반사되지 못하던 회색의 표면 위로 먼지가 춤추고, 오래된 기억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누군가의 웃음도, 발자국도 오래전에 멈춰 버린 그 자리.
오로지 바람과 그림자만이 벽을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세월의 무게를 고요히 견디던 벽에

어느 날 눈부신 이야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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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벽화봉사 동아리 학생들이 주말을 반납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붓을 들었다.
첫날은 비가 내려 그리던 벽화가 젖지 않도록 벽을 서둘러 덮어야 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물감이 번지지 않게 그들은 젖은 공기 속에서 조심스레 비닐을 덮었다.


열정은 온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다.


둘째 날은 하늘이 맑았지만, 11월의 바람은 차가웠다.

손끝이 시리고 입김이 흩어졌지만 그들은 추위를 이기며 다시 벽 앞에 섰다.

찬 공기 속에서 붓끝은 오히려 더 단단했고 그날의 색은 유난히 따뜻했다.

하루가 저물어 갈 무렵, 어둠이 내려앉은 벽 앞에서 그들은 마지막 붓질을 멈추지 않았다.
젖은 공기 속에서도 붓끝은 떨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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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회색의 벽이 서서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던 시간, 마침내 벽화가 완성되었다.

하얀 목련이 흐드러지고, 푸른 언덕 위에는 세 명의 학생이 벤치에 앉아 웃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푸른 하늘 아래 학교가 서 있고, 종이비행기 한 대가 바람을 타며 미래로 날아간다.
이 벽 앞을 지나는 아이들은 이제 고개를 들어 미소 지을 것이다.


낡은 회색 벽은 더 이상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이 자라는 교정의 첫 장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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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벽화는 단지 그림이 아니다.

비를 견딘 인내의 시간

함께한 마음 그리고 서로를 향한 따뜻한 시선이 만든 작은 기적의 풍경이다.

그날의 붓끝에는 ‘사람이 사람을 믿는 마음’이, ‘함께라서 가능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희망이란, 어둠 속에서도 손을 내밀어 서로의 빛을 찾아가는 일이다.


언젠가 이곳을 지나며 자라날 학생들도 이 벽 앞에서 꿈을 꾸게 되길.

비바람을 견뎌낸 색들이 말없이 속삭일 것이다.

괜찮아, 너의 시간에도 반드시 봄은 온단다
세상을 향해 날리는 종이비행기처럼


우리의 아이들이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길 바란다.

그 날갯짓 하나하나가 또 다른 희망의 풍경이 되어

이 벽 위에, 그리고 마음 위에 오래 남기를.

희망은 언제나, 가장 낡은 자리에서 피어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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