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학생이다. 삶이란 거대한 교실에서
운동장 한편, 늦은 오후의 햇살이 길게 기울어 있었다.
바람이 축구공처럼 가볍게 잔디 위를 구르며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실어 나르고, 멀리 스피커에서는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그 소리는 낡은 스피커에서 나왔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운동장 한편의 벤치에 앉은 한 학생이 조용히 그 목소리를 따라 읊조렸다. 손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땀자국이 남아 있었고, 신발 끝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는 친구들과의 말다툼 때문에 마음이 뒤틀려 있었다. 세상이 자신만 힘든 것처럼 느껴졌던 그 순간
- 낡은 스피커의 시가 귓가를 스쳤다.
‘우울한 날에는 참아라, 기쁜 날은 반드시 올 터이니.’
아이는 고개를 들어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금빛 햇살이 철봉 끝에 걸려 반짝이고, 달리던 아이들의 웃음이 바람에 섞여 번졌다.
삶이 그를 속였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속지 않으려는 듯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그때, 매점 쪽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바뀌었다. 하늘은 천천히 붉게 물들고 운동장에는 하루의 마지막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 아이는 주머니 속 손을 꼭 쥐며 속삭였다.
“그래, 오늘은 참자. 언젠가 다시 웃을 수 있을 거야.”
그 순간, 시 속의 말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마음은 미래에 사니, 현재는 항상 어두운 법…’
아이는 그 어둠 속에서도 작게 반짝이는 불빛 하나를 본 듯했다.
그것은 시가 남긴 희미한 위로의 등불이었다.
그때 나는 상상했다. 만약 교실이 세상의 축소판이라면, 이 시처럼 이곳에서 나로서 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는 없을까?
사랑하는 법, 두려움을 이겨내는 법, 다시 일어서는 법 말이다.
그 상상은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내가 꿈꾸는 수업으로 자라났다. 그 수업의 이름은 〈잘, 살아내는 법〉이다.
이 수업에는 교과서도, 정답도 없다. 대신 ‘나 자신’이 교과서가 되고, ‘삶’이 문제집이 된다.
하루의 끝, 아이들에게 묻는다.
“오늘, 너는 너를 얼마나 이해했니?”
교실은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살아 있는 배움의 공간이 된다.
이제는 중년의 내가 그 시절의 나였던 그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너는 이미 충분히 아름답단다. 삶은 정답이 아니라 이야기란다. 그리고 너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야.”
언젠가 모든 학생이 떠나고 교실 불이 꺼진 뒤, 칠판 위에 이런 문장이 남아 있으면 좋겠다.
“선생님, 상처는 나를 아프게 했지만, 그 아픔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오늘 내가 배운 것은 지식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용기였어요. 그래서 살아보고 자꾸 살아보고 싶어 져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우울한 날에는 참아라 기쁜 날은 반드시 올 터이니
마음은 미래에 사니 현재는 항상 어두운 법
모든 것, 한순간에 사라지나 지나간 것 모두 그리움이 되리니
오늘도 이 시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바람 사이로,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위로처럼
그렇게 조용히.....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우리는 가능성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