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흘러가는 대로 인생을 던져두어라
과음을 했다. 직장동료의 집들이가 있던 금요일이었다. 30대에 집을 마련한 직장동료의 집들이에 초대받아 집들이의 정석이라 불리는 중국요리 모음집과 폭탄주를 정신없이 돌렸다. 대학시절 수리경제학 교수님의 최애 음식이던 고추잡채와 먹는 소맥은 다음날 일출산행을 계획했던 나를 단잠에 취하게 만들었다.
사실 집들이에 초대되고 난 후로 일출산행은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지난번 방문했던 속리산 문장대의 미칠듯한 뷰를 보고 나서 이곳에서 조만간 일출을 보겠다는 다짐을 꽤나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다짐을 소맥과 함께 털어 넣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며 일출산행은 포기하고 소모임 어플에서 새로 가입한 등산 소모임에 번개 산행에 참여하기로 했다.
사실 이것마저도 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눈을 뜨자 어제 마셨던 중국음식과 술들이 배에서 휘몰아쳤고 앞이 뿌옇고 머리가 어질 했다. 그래도 처음 나가는 모임이었고 막상 가면 또 재미있게 등산을 할 걸 알기 때문에 샤워를 하고 정신을 조금 차린 뒤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 자동차에 기름이 부족하다는 경고등이 들어와서 기름을 넣고 수통골로 향했다. 지각이었다. 6분 정도 늦게 도착하였고 모임에 참석하는 분들에게 조금 늦는다고 연락을 하였다. 처음 가본 수통골은 낯설었다. 그리고 난 낙오되었다.
소심한 성격 탓에 조금 늦은 것이 미안했는지 선뜻 어디 계시냐고 연락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 혼자 주차장을 배회하다 20분이 지나버렸다. 그제야 혹시 먼저 출발하였는지 여쭤보았고 나는 이제야 나 혼자 남겨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분명 내가 늦은 건 맞지만 조금 늦는다고 미리 얘기하였고 천천히 오라는 답변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를 놓고 갔다는 것은 정말 배려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산행을 주최한 사람의 이름을 계속 되뇌며 나의 마음속 한편에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반신반의했던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아직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30분쯤이 지났을까. 인원 파악을 잘못하여 다 온 줄 알아서 먼저 출발해버렸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 답변을 듣자 마음속에 가득 찼던 불타오르는 화들이 가라앉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나 혼자 남겨두고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하여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화가 났었나 보다.
그렇게 나는 등산을 시작하였다. 사실 모임에서 진행했던 코스를 따라서 조금 빨리 걸으면 그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평소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이는 등산로를 향해 돌진하였다. 조금 가다가 문득 든 생각이 '내가 그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알아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정말 그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때 즈음 모임 주최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혹시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냐는 연락이었다. 주차장 바로 옆쪽으로 들어온 나는 내가 온 길을 설명했다. 말을 하면서도 뭔가 싸했다. 완전히 반대로 온 것이다. 사실 술기운이 남아 있었던 터라 모임에서 어떤 코스로 가는지 제대로 확인도 안 해보았다. 그저 따라가기 위한 마음을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무지하고 안일할 수가 있는지, 이렇게나 준비를 안 하고 올 수가 있는지에 대해 고뇌하며 주차장에서 화를 삼키던 내 모습이 창피해졌다. 그리고 그 주최자는 나에게 '중간에서 만나면 되겠네요'라는 말을 하였고 나는 '이따 만나요'라고 답하게 되었다.
사실 이때부터 산행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만나든 못 만나든 신경 쓰지 말자는 마음가짐을 다시 붙잡게 되었고 언제나처럼 혼자 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혼자 산행을 하면 내가 주체가 된다. 누군가가 어떤 방향으로 가던, 얼마나 빠른 속도로 가던 상관없다. 오롯이 나만 신경 쓰면 되기 때문이다. 늘 그랬든 수십 번의 혼산 경험으로 숙취에 시달리는 나는 오늘 얼마나 빠르게 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며 걸었다. 컨디션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기억은 안 나지만 꽤나 많이 마셨던 게 분명하다. 쉬운 코스였음에도 호흡이 가파르게 차올랐다. 폐가 아플 정도로 숨이 찼고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숨은 곧 틔이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컨디션 난조 건 숙취가 있건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건 상관없이 오늘은 조금 빠르게 걸었다. 평소처럼 주변 경치를 즐기고 산에 흠뻑 젖으며 걷지는 않았다. 한 마리의 갈 곳을 잃은 산짐승처럼 앞만 보고 걷고 뛰었다. 사실 이러한 행동에 이유는 없었다. 굳이 찾으라면 아까의 창피함을 잊고 싶었던 것 같다.
산행의 중반부쯤 들어섰다. 빈계산의 정상을 지나고 하나의 봉우리(금수봉)를 더 지나서 도덕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중간지점이라 생각했고 '혹시나 소모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약간의 설렘으로 바뀌어 있던 시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나만 알아본 듯하였다. 분명 모임 인원수며, 연령대며 쉬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소모임 사람들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는 척할 수 없었다. 이유는 없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다. 낯을 많이 가리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을 잘 걸지 못하는 성격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와 연락을 주고받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아무한테나 가서 '당신들이 그 사람들이 맞나요?'라고 물을 수 있을 만큼 대범한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지나쳐버렸다. 지나치고 나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성격의 사람이라는 것을 요즘은 그냥 받아들이고 있던 터라 별로 자책하지 않았다. 그렇게 15분을 더 걸었다.
주최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어디쯤인지 물어보았다. 나의 위치를 알렸고 우리가 엇갈린 것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평소의 나 같았으면 그냥 그렇게 하산하고 혼산으로 마무리할 게 뻔했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고 같이 담소도 나누고 함께하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뒤로 돌아 소모임을 지나쳤던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조금 빨리 가볼게요! 만날 수 있으면 만나요!' 이런 식의 메시지를 보냈던 것 같다. 사실 산에서 아무리 체력이 좋고 빨리 간다고 하더라도 이미 먼저 출발한 사람들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냥 갔다. 사실 별로 생각이 없었던 것도 있다.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냥 그 상황에 던져보았다. 그 자체가 그날의 산행의 재미 었던 것이다.
거의 사십 분 이상을 뛰고 걸으며 달려갔고 다행히도 하산이 완료되기 직전에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왜 이리 반가웠는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적 친밀감이 쌓였는지 원래 알던 사람을 산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서로를 반겨주었다. 사실 생각해보니 같이 산행을 한 시간은 10분남짓이었던 것 같다. 앞에 있었던 일들을 서로 얘기하고 '미안해요, 괜찮아요, 제가 죄송하죠'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주차장에 돌아오게 되었다. 꽤나 고된 산행을 한 듯했다. 4시간가량의 산행과 10km 정도의 거리를 걸으며 지친 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 과정 속에 함께 있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함께 완등 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서로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나에게는 잊지 못할 산행이 될 것 같은 기분이다. 어느 때 보다도 비참하고 강렬하며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등산이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가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렇지만 나 혼자 했던 상상들이 옹졸한 마음들에 대한 반성을 하기도 하였고 산행에서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거라는 기대감과 설렘을 느끼게 해주기도 하였고, 등산이라는 활동에서 느낄 수 있는 짜릿함과 상쾌함을 느낄 수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산행은 인생에서 처음이었고 이러한 감정과 느낌들 때문에 더욱 뜨거웠던 산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등산은 오르고 내려가고 삶의 과정과 비슷하다.
나는 수통골 산행에서 인생을 겪을 수 있었다.
등산코스 : 수통골 주차장 - 빈계산 정상 - 금수봉 - 금수봉 삼거리 - 자티고개 - 금수봉 삼거리 - 금수봉 - 빈계산 정상 - 수통골 주차장(약 10km, 소요시간 약 3시간) : [원래대로라면 자티고개 - 도덕봉 - 수통골 주차장]
이용 주차장 : 수통골 주차장(주차비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