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관하여

사소한 철학적 사유

by 시지프
아침에 잠이 깨어 일어난 저는 원래대로 경박하고 가식적인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요조의 깊은 슬픔을 느꼈다. 요조는 세상에 환멸을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소설에서 요조는 계속해서 세상에 구토(嘔吐)를 했으나, 그럼에도 다시 세상의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싶어했다. 이는 심리학적 용어로는 ‘분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분열이라 함은 자아가 통합되지 않고 심리가 양가적 상태를 오가는 것을 말한다.

나는 그의 모습이 나와 너무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상태를 심리 상담사님께서는 자아상이 통합되어 있지 않다고 표현하셨다. 나는 이를 타개하려고 노력했으나, 결코 타개할 수 없는 [카뮈의 표현으로] 부조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저는 점점 더 얼간이가 되어갔습니다. 아버님이 이젠 안 계신다. 내 마음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던 그 그립고도 무서운 존재가 이젠 안 계시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공연히 무거웠던 것은 아버지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모든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고뇌할 능력조차도 상실했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나 또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고뇌에서 해방된 느낌 또한 받았다. 누군가가 보았을 때는 비인간적인 감정일 수 있겠지만, 내게 아버지는 세상의 양면을 알게 해준 존재였고, 씻을 수 없는 큰 상처와 동시에 앞으로 살아갈 힘이 되는 큰 유산 또한 남겨준 존재였다. 내가 요조와 다른 점이라면 나는 오히려 의욕을 얻었고, 공허함에 대하여 고뇌할 힘을 얻었다는 점이다.

타인에게 슬픔을 털어놓으면, 우리는 그를 괴롭히게 될 뿐이다. 그것은 그가 그 슬픔을 자기 것으로 여기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가 우리에게 애착을 느끼게 하고 싶다면, 우리의 추상적인 고통만 그에게 털어놓아야 한다.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열렬하게 받아들여 주는 것은 그러한 고통뿐이다. …(중략)… 슬픔에는 끝이 없다. - 에밀 시오랑, 『태어났음의 불편함』 -

이와 같은 공허함이 야기한 수많은 감정 덩어리들은 형용될 수 없고, 오직 내 행동의 변화와 그의 반복을 통해서만 그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시오랑의 말처럼 내 슬픔은 타인에게 짐을 준다. 타인은 짐이라고 느끼지 않을지라도 나는 내가 말을 함으로써 타인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타인에게 고통을 유발함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는 이유는 내 감정을 타인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기저에 깔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진실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되고, 진실되지 못한 행동을 하며 그로 인해 슬픔을 느끼고 상념에 빠진다.

이른 새벽 감옥의 문이 열릴 때 그 문 앞으로 끌려나온 사형수가 맛보는 기막힌 자유, 삶의 순수한 불꽃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죽음과 부조리야말로 단 하나의 온당한 자유의 원리, 즉 인간의 가슴이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자유의 원리임을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두 번째 귀결이다. …(중략)…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 통찰력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가치의 척도가 무용해진다. …(중략)… 끊임없이 의식의 날을 세워 가지고 있는 한 영혼 앞에 놓이는 현재 그리고 줄지어서 지나가는 수많은 현재들, 그것이 바로 부조리한 인간의 이상이다. 그러나 이때 이상이라는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사실 그것은 부조리한 인간의 소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으로 오직 그의 추론의 세 번째 귀결에 불과한 것이다. 부조리에 대한 성찰은 비인간적인 것을 고통스럽게 의식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 여정의 종점에 이르면 인간적 반항이라는 열정에 찬 불꽃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

이렇게 공허함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면 결국 시오랑의 말처럼 슬픔이 끝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무상한 인생은 고통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까? 그 답은 결국 나에게 달려있다. 도(道) 앞에서는 만물이 평등하듯이[齊物], 통찰력 앞에서는 가치의 척도가 무용하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든 자유로워질 수 있고 현재의 순간을 불꽃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간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구역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인생에 자연스러움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 상호주관성을 확인받고 싶은 욕구를 무시할 수는 없다. 오직 혼자서만 살기에는 너무 복잡한 세상이다. 카뮈는 연극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연극을 만들어나갈 때 극단 모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는 공통의 목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다. 결국 이는 사랑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모두 부조리한 인생에 던져졌고, 자연적‧사회적 운에 의해 어쩌면 운명에 묶인 삶을 산다. 내가 낮은 곳에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비극적인 우리의 운명을 함께 긍정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내가 성인(聖人)이 될 수는 없겠지만, 인간적인 반항으로서의 사랑을 실천하고 싶다. 내가 언젠가는 상처로 숨을 쉬는 것이 익숙해지기를 바란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모든 생물에 이로움을 주면서 다투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즐겨 있다. 그런 까닭에 물은 도에 거의 가까운 것이다. 사는 곳은 땅을 선택하여야 하며, 마음은 생각이 깊어야 좋고, 사귀는 벗은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하고며, 말은 믿음성이 있어야 좋으며, 정치는 다스려져야 좋고, 일의 처리는 능숙해야 좋으며, 행동하는 것은 때에 알맞아야 좋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다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됨이 없는 것이다. - 노자, 『도덕경』 -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 『신약성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