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슬럼프를 이겨냈을까? _회사 때려치고 영화 만들기
한 줄로 이야기하자면,
30대 후반이었고 잘 다니던 나름 탄탄한 직장을 그만두었다. 영화를 만들겠다는 일념아래..
이렇게 써놓고 보니 뭔가 영화에 엄청난 뜻이 있었겠다고 오해할 것 같아 몇 줄 더 써야 할 것 같다.
내 어릴 적 꿈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그래서 결국 게임회사에 들어갔고, 비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의 꿈은 바로 반쯤 접혀 내동댕이쳐졌다.
SKY + 틱장애?를 가진 누가 봐도 특이한 사람들이 허공을 응시하며 한 시간 동안 이상한 주문을 외우며 코딩을 하는데... 단 하나의 에러도 없이 게임이 실행되는 모습을 보았다.
비유하자면, 마치 소설가가 한 시간 만에 단편소설을 써서 공모전에 냈는데, 단 번에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입상한 것과 비슷하다.
사람마다 주어진 천재적이 재능이 있고, 그 재능을 꽃피울 일을 찾으면 된다.
그러한 보편적 상식아래 프로그래머의 꿈은 바로 접고 다음 시나리오작가에 도전했다.
20대 중반부터 꾸준하게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쓰고, 공모전, 시나리오스터디 모임 등 한동안 열심히 도전했다.
글이라는 것은 컴퓨터처럼 정확하게 수치화되거나 정량화된 결과가 나오는 작업은 아니다.
때문에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했을 때처럼 그 괴물 같던 선배들을 만날 일은 없었지만,
어쩌면 그러한 이유로 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글에 질질 끌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집착은 더 강해진다.
"왜? 왜! 나는 공모전에 잘 안되지? 내 시나리오를 영상으로 직접 만들어서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심사위원들도 쉽게 공감할 수 있을 텐데... 그럼 내가 한번 직접 만들어 볼까?"
2016년쯤 DSLR카메라가 보편화되고 HD테이프 방식에서 SD카드로 저장장치가 변화되면서 촬영은 '누구나'의 영역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나 역시 회사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이태원에 '영어로 영화만들기' 모임을 만들었다.
그냥 한국어로 영화 만들기도 힘들지만, 영어로 만드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웠고,
그냥 한번 궁금해서 온 초보들과 중급자들 사이에 의견 조율하는 것도 무척 어려웠다.
다행히 두세 편.. 억지로 촬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지만 작품도, 팀도 그렇게나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구경 온 첨 보는 친구가 뼈 때리는 한마디를 던져 주었다.
"님아! 회사 다니면서 이렇게 하는 건 좋은데, 전업으로 목숨 걸고 작업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은 잘 알고 하는 거지?"
알고 보니 그 친구 아니지, 그 '분'께서는 이미 '스토리공모대전'으로 1억 가까이 상금을 거머쥔 분이었고,
그분의 한마디가 계속 뇌 속에서 꿈틀대더니 급기야 나는 회사를 뛰쳐나오기에 이르게 된다.
그래! 이렇게 어렵고도 소중한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회사쯤은 그만두고
전업으로 정중하게 시작하는 게 상식이지!
당신은 시간의 속도감을 제대로 느껴본 적인 정말 있는가?
현실의 일주일은.. 그리고 한 달, 일 년의 속도감을 몸소 느껴본바,
그것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루를 한 시간 단위로 나누어 무엇을 했는지? 뭘 먹었는지? 시간마다 직접 적어보면,
대부분의 시간은 잠을 자고, 먹고, 씻고, 청소하고, 빨래를 한다는 사실을 피부에 와 닫게 경험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남는 소중한 열 시간 남짓을 회사와 출퇴근에 모두 바쳤다면,
이제 전업 예술가로서 무언가를 배우고 실천하고 집중하는데 하루에 열 시간 이상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멍 때리고, 나도 모르게 걱정하며 한눈을 파는 사이에
다시 끼니가 돌아오고 자야 할 시간이 돌아오는 답답한 일상이 매일 반복됐다.
그나마 내가 했던 일 중 제일 정상적이고 잘 한일은 그 답답한 과정을 카메라에 담아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용은 대부분 고민, 개똥철학, 새롭게 배운 영화기법, 작품제작 과정등 정말 억지로 꾸역꾸역 한편씩 정리하고 촬영해서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조회수가 급증하고, 구독자가 폭발을 하기 시작했다
...는 거짓말도 할 수 없는 것이 내 유튜브 채널(영화만들기 Micro Series)에 들어가 보면 아직도 구독자가 만 명을 넘지 못했으니 당시에 어땠을지 충분히 상상이 가시리라.
'구독자 백 명? 아! 영화 만드는 거 사람들이 정말 관심이 없구나... 아니, 어쩌면 내가 엄청나게 재능이 없거나 뻘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성공의 기억은 기쁨으로 쌓이지만, 실패의 기억은 대단히 아프게 쌓인다.
성공은 피로를 날려버리지만, 실패는 피로감을 두배로 누적시킨다.
실제로 몸이 아프기 시작했고, 회사 퇴직금은 점점 줄어드는데 왜? 월세 내는 날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올까?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꿈을 접을 땐 크게 아프지 않았는데,
시나리오 작가, 스토리텔링, 영화에 대한 꿈을 접는 것은 정말 아픈 일이었다.
다 접자! 방에 누워 우울한 한 달을 보냈다.
몸이 좀 나아지자 겨우 유튜브 계정에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간간히 댓글을 달기 시작한 것이 보였다.
아주 드문드문...
'감독님 시간 되시면 이 메일 주소로 연락 주세요!'
누군가 응답을 해왔다. 누구지?
그렇게 아솔감독님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단편영화 시나리오 써주세요!'
김아솔감독님은 모든 면에서 부러운 면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다.
우선 현직 교사로 교직 생활을 유지하며 영화감독 내공을 척척 쌓고 있었다.
교사 휴직제도를 활용해 캐나다 필름스쿨 석사과정을 쌓고 있었고, 영어는 두말할 필요 없이 잘했다.
영화제작에 뜻을 함께한 동료교사분들과 영화제작팀을 구성했는데,
학습 능력이 뛰어난 평균 이상? 아니, 똑똑한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모아 그 시너지를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감이 떨어질 데로 떨어진 난, 그저 내 시나리오가 걱정됐지만, 감독님은 너무 재미있다며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고, 한편으로는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시나리오를 교차 검증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아솔 감독님이 캐나다 필름스쿨에서 만난 '네이든'이라는 중국계 캐나다인을 촬영감독으로 섭외했는데,
그는 영화에 대한 열정이 엄청났고, 영상미 있는 사진과 영상 전문가로 이미 국제적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구였다.
아솔감독님의 이전 작품들을 그와 함께 했고, 확실히 화려한 영상미가 있었지만 시나리오상 살짝 밋밋하게 끝나는 스토리텔링을 보완하고 싶어 날 섭외 한 것이었다.
그러니.. 나의 시나리오 검증은 네이든의 몫이 되었고 우리는 영어로 싸우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토닥투닥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아솔감독님이 칭찬해 주는 역할, 네이든이 까는 역할을 적절하게 분담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도 모르고 이틀 전에 룰루랄라 광주(전라) 촬영장에 초대받은 난, 네이든과 함께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단둘이 밥도 먹고 밤늦게까지 시나리오를 고치고, 또 고치는 심야 데이트를 즐겨야만 했다.
그래도 정말 좋았던 건, 아니 매우 아이러니했던 것은
이태원에서 '영어로 영화만들기' 모임을 주최했던 경험이 매우 도움이 되었다는 것과 내가 만든 그 모임이 왜 망했는지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언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초보들이 전문지식 없이 영화를 만들겠다 깝죽대는 모습을,
언어도 익숙하고 전문지식과 경험이 한 보따리인 이들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 보았다.
스스로 무척 부끄러워지는 것이었다.
천외천 , 天外天 (*하늘 위에 하늘...)
생각할 수 없이 엄청난 천외천! 봉준호 감독님보다는, 나를 기준으로 한두 겹 천외천을 더 쌓은 이들을 관찰하는 것이 피부에 훨씬 따갑게 와닿았다.
감사하게도 촬영 전 프리프로덕션과 촬영이 진행되는 프로덕션 과정을 모두 카메라에 담에 유튜브에 올릴 수 있었고, 그때 촬영 했던 콘텐츠가 조회수 2만 회를 돌파했다.
그 기회를 바탕으로 정부제작지원금을 몇 번 받았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해당 콘텐츠는 유튜브 채널 '영화만들기 Micro Series'에서 지금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우연과 아이러니는 운일까? 실력일까?'라는 도발적인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런 다국적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그저 운일까?
누구에게나 그런 기회가 왔다고 작업을 완수할 수 있을까?
나의 노력요소를 굳이 따지자면 꾸준히 글 쓰며 꿈을 이어 온 것, 서른 넘어 시작한 영어, 때려친 회사, 유튜브라는 요소가 있었다.
아솔 감독님의 경우는 교직생활을 이어가면서 쌓아 올린 꿈, 빚을 내서라도 캐나다 유학길에 오른 열정, 유창한 영어 실력을 만들기 위한 고단함, 자신의 주변 리소스를 최대한 활용해 융합하는 노력등이 있을 것이다.
촬영감독 '네이든'도,
앞서 자세한 언급은 못했지만 제작총괄을 맡은 선생님도,
소품미술을 맡은 선생님도,
오늘만큼은 연기자가 되어야 했던 선생님도,
촬영장에 모이기까지 모두 각자의 사연과 노력이 있었다.
크게 잘된 사람들은 말한다,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구구절절이 다 말할 수도, 형용할 수도 없어서 그 한마디로 담백하게 정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난 아직 그렇게 크게 잘되지 않았기에 구구절절하게 내 경험을 공유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운이든 노력이든,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촬영은 아주 깔끔하게 맞아떨어져 끝이 났다.
잘하려고 기를 쓰지도, 어찌할 줄 몰라 쩔쩔 매지도 않았다.
더함도, 덜함도 없이 그동안 쌓아왔던 실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물론 중간에 몇 번의 위기는 있었다.
소품이 없어졌다든지, 주인공이 초등학생이었는데 갑자기 사라진다던지...
심지어 카메라의 여분 배터리가 고장 나 30분마다 충전하며 촬영해야 했다던지...
누가 보면 그것이 커다랗고 엄청난 문제일 수 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거쳤던 여러 난관과 좌절들에 비하면,
우리에겐 재미있는 문제를 하나씩 순서대로 해결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모든 촬영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폭우가 내렸다.
지금 시점에서야 엄청나게 의미 있었던 촬영장이었지만,
당시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는... 촬영이 늘 그렇듯 복잡 다양한 감정으로 끝마쳐졌다.
엄청나게 행복했던 촬영이었다기보다, '다행이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잘 되어서...'
늘 그렇듯 몸은 피곤하고,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촬영장이 전라도 광주여서 수도권으로 올라가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게 분명했다.
늦은 밤 그냥 차에서 자기로 했다.
봉고차 뒤편 침낭을 깔기에 넉넉한 공간이 있었고, 여름이라 춥지도 않았지만 잠은 잘 오지 않았다.
이번 작품이 끝났고, 그럼 난 또 무엇을 해야 할까?
꿈에 도전하는 이들이 항상 마주치는 '걱정하는 마음', 그것이 다시 신세 한탄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
우리가 만든 영화가 광주독립영화제 초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난생처음 내 시나리오가 영화가 되어 독립영화제에 상영된다? 설레고 기뻤지만,
영화제가 끝나면 이번 일로 내 미래가 크게 바뀔 것인가를 생각해 봤을 때,
내일 역시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며,
아니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걱정과 신세한탄으로 바뀌는 메커니즘은 나만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예술을 향해, 꿈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 딛을 때마다 무게가 늘어나는 어깨 위 십자가일까?
그것은 항상 내 마음속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독립영화제에 상영된 이력으로 난 예술인활동증명을 바로 했고, 제작지원사업, 예술경영지원센터 예술창업지원등을 받아 가뜩이나 어려웠던 코로나 기간을 나름 만족스럽게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몇 년 훌쩍 지내고 아솔감독님과 연락은 뜸해졌다.
아솔감독님은 영화 석사과정을 끝내기 위해 캐나다유학길을 선택했고,
나 역시 지방영화제 운영위원, 단편영화제작, 예술창업, 영화교육강의, 도시재생예술 등 새로운 길을 확장하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캐나다 국제영화제에서 상 받았어요!'
그러던 중 아솔감독님으로부터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캐나다 Eye2eye 국제영화제에서 상과 상금까지 받은 것이었다.
솔직히 엄청나게 기쁘다기보다 광주독립영화제에 갔을 때처럼, 아! 좋다...
그런데 이 일로 내 미래가 크게 바뀔까?... 또다시 마음속 불편한 메커니즘이 동작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뭔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처음 회사를 그만두고 천정을 보며 신세 한탄하던 나와 비교하면, 지금은 해외영화제 진출? 예술창업? 제작지원금? 장편영화 도전? 등의 키워드를 생각해야 하는 천외천 탈피를 꽤나 한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걱정과 신세한탄 메커니즘은 나와 당신의 마음속을 계속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성장원동력이 아닐까?
불편함과 걱정을 이겨내면 그에 대한 보상을 받는 매트릭스 속 시스템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얼마 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매트릭스'(1999)를 진지하게 다시 봤다.
1999년,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는지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다시 봐도 1999년작 맞아? 할 정도로 그래픽이며 전개가 완벽하다.
그리고 그 영화 속 스토리텔링은 AI와 메타버스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점점 더 현실화 되어가고 있다.
사실, 눈을 감으면 내가 지금 매트릭스 세상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정확히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예술을 시작한 나는 모피어스의 빨간약을 먹어 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예술이 없는, 사색이 없는 세계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지금 너무 멀리 온 듯하다.
이제 예술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미리 경고한다. 빨간약을 먹으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대신 또 다른 천외천,
그리고 또 다른 걱정과 희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 영화만들기 과정 및 아솔감독님 인터뷰 등 유튜브 채널 (영화만들기 Micro 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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