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꾸는 꿈은 결혼일까? 행복일까?
결혼에 대한 제 관념을 짧은 생각으로 두서없이 적은 글입니다 :)
비닐봉지엔 종이컵과 생수 병, 맥심 커피 스틱 그리고 구운 오징어와 적당히 입이 심심하지 않을 정도의 과자가 들어있다. 아빠는 일찍이 나가 차를 아파트 문 앞에 세워 두었고, 엄마는 여러 짐을 들고 가스 밸브와 멀티탭을 확인한다. 아이는 쏟아지는 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선크림만 발린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현관에서 엄마가 나오길 기다린다. 한 가족이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인다.
아빠는 차에서 종이 지도를 펼쳐 무슨 고속도로를 통해 가야 할지 확인한다. 엄마는 다리 사이에 불편하지 않을 위치를 찾아 짐을 담은 봉투를 내려놓는다. 몇 년째 같은 트랙만 반복하는 CD가 지겨운지, 차 속은 누구인지도 모를 청취자의 사연과 우리의 취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신청곡이 채운다. 그렇게 고속도로를 달리고 이미 잠든 아이는 구운 오징어의 꼬릿한 냄새에 눈을 뜬다. 엄마는 조수석에 앉아 아빠에게 오징어 다리를 한 줄씩 건네 주고 눈을 뜬 아이에게도 적당히 덜어 뒷자리로 건네준다. 아이는 몇 번을 더 받아 턱이 아파 더 이상 씹기 힘들 때가 되어서야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지금 향하는 여행지에 먼저 가본 엄마, 아빠의 추억 대화를 엿듣는다.
엄마와 아빠는 항상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기어 스틱 뒷 편의 좁은 공간에서 손을 잡는다. 아빠는 한 손 운전을 곧 잘하셨고, 손발이 찬 엄마는 열이 많아 따뜻한 아빠 손을 좋아하셨다. 뒷자리에서 손을 마주 잡은 엄마, 아빠의 모습과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자연의 색감과 라디오 신청곡의 소리 속에서 배까지 부른 아이는 그 순간 어떠한 걱정과 불편 없이 온전한 행복과 평화를 느낀다.
실제 나의 어릴 적 부모님의 모습이고, 드라이브와 여행의 거리만 다를 뿐 거의 매주, 적어도 삼 주에 한 번은 항상 저렇게 다니며 나에게 국내의 아름다운 여러 곳을 보여주셨다. 물론 부모님이 워낙 여행을 좋아하셔서, 지금도 시간만 나면 다 같이 다닌다.
내가 우리 가족을 생각하고 결혼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이고, 그때의 내가 느낀 행복과 평화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 누군가 보기에 이상적인 모습일 뿐 현실은 다르다 할 수 있지만, 다사다난한 현실 속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고 이젠 형과 내가 운전석, 조수석에 앉고 부모님이 뒷자리에 앉으며, 라디오가 아닌 그날에 맞는 노래를 직접 선곡하는 등 모습만 조금 달라졌을 뿐, 나에겐 이상향이 아닌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는 꽤나 비중 있는 현실이다.
결혼을 왜 하고 싶은지 스스로 물어보면, 나는 위의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물론 이십 대 중반이 되어 점점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미디어를 지배하는 결혼하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야깃거리 속에서도, 내가 그리는 가정의 모습(꼭 아이가 동반되지 않을 수 있다.)이 곱절 이상 가치 있다고 판단한다. 내가 자란 가정 역시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내가 그리는 모습 역시 이상이 아닌 직접 경험하고 자란 현실의 모습 중 하나이기에 더욱 당당히 결혼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결혼에 대한 인식 형성엔 다양한 요인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이 자란 가정환경이다. 결혼엔 필연적으로 가정의 개념이 동반된다. 새로운 가정을 꾸림에 있어 본인이 자란 가정환경은 그 어떤 요인보다도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침이 틀림없다.
결혼이 하고 싶은 이유에 대해 여러 요인 등을 제외하고, 나는 스스로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가정이라면 여러 현실의 어려움을 미리 알더라도 충분한 감수할 수 있는 가치를 가진다고 판단한다. 또한 내가 자라온 가정의 모습이 내가 꿈꾸는 모습이며, 나 역시 화목한 가정을 만들 자신이 있다. 그저 내가 배우고 바라본 모습대로 하고 싶다. 한편으로 나에겐 결혼을 하고 싶은 이유가 아닌 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충분치 않다.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나 주장들이 쏟아져 나온다. 국내 혼인건수는 지난 십 년간 약 2배가량 감소하였다.
중요한 점은 시기이다. 혼인율이 특정 시기의 급격한 감소 없이 최근 10년간 일정 수준으로 감소한다. 물론 매년 최저점을 갱신하지만, 특정 계기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여론은 현 세대를 가장 힘들게 표현한다. 시대에 맞는 결혼 부담을 최신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거지론, 퐁퐁남과 같은 사회적 프레임을 형성해 결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근본적인 요인이 아닌, 마치 노이즈 마케팅과 같이 그저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얄팍한 영향을 끼치려 한다.
작년, 재작년 혹은 5년 전과 비교해 진정 현시대에 결혼이 미친 짓이라는 근본적인 요인은 쉽게 찾기 힘들다. 그저 작년의 요인을 그대로 가져다 쓰지만(부동산 거품, 물가 상승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주장의 무게감이 떨어지기에 한창 유행 중인 사회 프레임 기법을 이용해 근 2~3년을 버티는 중이라고 보인다.
우리는 특정 누군가의 입이나 글을 통해 그러한 정보를 얻는다. 애초에 결혼에 반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의 의견엔 아무리 경계해도 상당 부분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저 그들이 전달하는 부정적 정보의 가치보다, 그들이 바라는 결혼의 가치가 낮을 뿐이다.
개개인의 가치판단 영역이 그저 목소리 큰 주장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담론에서 다수를 선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혼 담론을 지속하다 보면 결국 개인의 행복관에 대한 담론이라고 보아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존재하는 지도 모르는 ‘행복’이라는 개념을 쫓아 종교를 만들고, 사회를 형성하여 발전되어왔다. 또한 현대사회의 인간은 더 이상 후대에 유전자를 계승하기 위한 기계가 아니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유전자 계승은 의무가 아닌 선택의 영역에 들어왔고, 본인의 삶이 추구하는 행복과 가까운지에 따라 그 결정을 내린다.
결혼 역시 이와 같아서 현대엔 그저 개인의 행복 가치의 기준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를 위해선 절대적 행복의 존재 유무부터 파악해야 한다. 필자의 입장에서 절대적 행복은 존재하지 않으며, 유년기부터 행복의 상징적인 사례들을 교육받아 행복이라는 개념을 익히는 것으로 보인다. 행복을 긍정으로 교육하기에 다수가 행복의 사례와 상징을 쫓아 그 모습이 되고자 노력한다. 또한 같은 사례를 행복으로 판단하는 이들이 모여 같은 공동체를 더욱 공고히 한다.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으로 유명한 이 문장은 공동체가 행복을 다루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며,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 수 없을 때 불행을 느낀다.
그간 결혼과 단란한 가정의 모습은 다수의 선택이었고, 그렇기에 행복의 지표가 되기도 하였다. 실제 국가에서 행복한 가정의 상징을 설정하여 대대적인 홍보를 할 정도로 본인이 온전한 행복의 본질을 추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시대에 따른 출산율 조정 홍보 포스터는 공동체가 개인에게 가족 구성원의 인원수까지 지정해 행복을 정의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낳아라. 불려라. 믿기지 않는 어휘선택이다. 정부의 출산 정책으로 가족 인원수까지 지정해주는 걸 보면, 당시엔 결혼을 하는 것이 사회적 표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행복의 지표 중 하나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없다.)
이러한 절대다수의 선택이 행복이라는 정의를 통해 볼 때, 현재 결혼 적령기의 사람들은 여러 갈등에 놓여 있다. 결혼을 선택함에 있어 절대다수를 따라가기 힘든 구조이다. 단란한 가정을 행복이라 교육받은 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는 반대 주장에 맞닥뜨려 고민한다. 다수의 선택을 따라가고 싶지만, 절대다수가 없는 상황에 비교적 현시대의 목소리 큰 반대 여론의 영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앞서 결혼에 대한 인식이 개개인의 가치판단 영역이라 했지만 결국 행복의 한 가지 모습이고, 행복이 사회 공동체를 통해 설정되기에 개인의 인식 역시 사회 혹은 다수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사회와 다수가 없다면 개인의 인식은 발현될 수 없다.
내가 가진 결혼에 대한 깊은 바램은 사랑의 증명이 되는 결혼과 사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이었다. 하지만 결혼은 사랑이 가져다주는 행복의 최대치가 아니다. 사랑의 가장 큰 이벤트일 수 있지만, 모든 행복을 다 가질 순 없다. 행복엔 총량이 없고, 한 단계마다 행복을 이룰수록 다음 행복에 대한 욕구가 동시에 피어오른다. 결혼 후 안정적인 가정이 주는 행복이 충족되었다면, 사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행복의 모습을 갈망할 것이다. 더 이상 이러한 갈망이 피어오르지 않을 때 마주할 무기력함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삶에서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행복은 남을 위해 사는 것이라 했던 그의 말이 옳았다.”
“이날부터 남편과 나의 로맨스는 끝났다. 예전의 감정은 귀중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추억으로 남게 되었고, 아이들과 아이들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생겨났다. 이 감정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전혀 다르게 행복한 삶의 기반이 되었다.” 톨스토이 [가정의 행복]
결혼이 선사하는 행복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남들과 비슷한 행복으로 시작해,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그들만의 행복으로 그 길을 새로 한다. 여러 불확실한 가정들 중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그려나갈 행복을 공유하고 공감해 줄 수 있는 동반자가 있다는 점이다. 행복은 상대적이고 개개인의 절대적인 행복은 없다고 판단하기에, 상대성을 확인하고 공유할 수 있는 관계는 더욱 다양한 행복에 대한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주고, 이러한 관계를 둘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 개인의 삶에서 결혼이 가지는 긍정적 가치는 나름 절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강제된 ‘다른 생각’기계다. 그래서 결혼을 꿈꾼다.
나는 입학과 동시에 디자이너라는 명분으로 남들과 다른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압박을 받아왔다. 그리고 늘 나의 얄팍한 다른 생각은 부정되곤 한다. 나는 나의 내면 깊숙한 고소에 있는 관념 및 인식을 항상 경계해야 했고, 비평해야 했다. 모든 생각에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야 했다. 이러한 생각이 습관이 되고 디자인을 하지 않는 사람과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었음은 긍정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이젠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토 달고 싶고 대들고 싶어 한다. 그저 무조건 반박하려 한다. ‘다른 생각’은 책을 덮는다고 끝나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떠 다시 잠들기까지 모든 순간마다 떠오르는 생각에 근원과 명분을 찾고, 반박하여 나만의 생각을 정립해 남들을 설득할 논거를 마련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자주 얻지만, 일상이 너무 피곤하다.
그래서 난 사회적 표준에 의지한다. 내가 생각하는 표준인 결혼의 모습은 나의 중. 장기적인 목표이자 매 순간 하는 노력의 강력한 명분이 되어준다. 또한 감사히 결혼의 긍정적인 요소를 많이 본 가정에서 자랐기에, 내가 표준이라 설정한 관념에 더욱 큰 호감과 확신을 가진다.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지만, 어딜 가나 현 젊은 세대가 정말 힘든 세대라고 말한다. 심지어 결혼을 안 하는 것이 아닌 못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이상 큰 타격이 되지 않는다. 너무 흔하다. 그럼에도 불구, 계속 들다 보면 분명 나의 근간이 흔들리기도 한다. ‘정말 차라리 혼자 벌어서, 넉넉히 쓰는 삶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라고 한동안 생각하여 비혼 주의라 스스로를 정의 내린 시절이 있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를 매우 좋아한다. 특히 ‘어바웃 타임’은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소위 인생 영화이다.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내 속에 쌓여갈 때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로맨스 영화를 찾아보곤 한다. 나는 아직 결혼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바꿀 생각이 없기에 아름다운 로맨스와 가정 영화를 보며, 줄어든 결혼에 대한 욕구를 정기적으로 채워 그 균형을 맞추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가진 표준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