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
세월의 낡은 냄새가 풍기는 배낭을 멘
한 사람이 산길을 걷는다.
가방 속에는
오래된 질문들과 풀지 못한 채 구겨 넣은 숙제들,
하지 못한 일, 실수, 후회와 미련,
그리고 미움과 증오의 돌덩이들이 가득하다.
그것이 마치 제 삶의 증거인 양
기꺼이 마른 어깨를 내어주며 굽은 길을 악착같이
오르고 있다.
길을 지나던 이들이 가볍게 한 마디씩 던진다.
"그 무거운 걸 왜 들고 가요, 그러다 다쳐요. “
그는 대답 대신 자신의 짐을 더 바짝 끌어당긴다.
비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채우는 법을 먼저 배운 탓이다.
몇 걸음 가다 또 멈춰 서서 가방을 다시 열어본다.
먼지 묶은 기억의 덩어리가 엉킨 채
발등 위로 툭, 무겁게 떨어진다.
이때, 매정한 듯 다정한 바람 하나가 어깨를 스치며
배낭을 절벽 아래로 자비 없이 던져버린다.
주저앉아 절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얼어붙은 시간 위로 맑은 봄이 흐르기 시작한다.
비워진 어깨 위로 들이키는 선명한 첫 숨.
그 숨결은 가장 가벼운 해방이 되어
비로소 그의 봄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