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Undone Self

by HSHS




강력한 자기확신과 자신만만함은 어린 시절 나의 가장 큰 자산이었으나, 성인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당시엔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나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꼭 그렇지는 않았다.

스무 살 즈음, 바로 코앞에 살던 친구네 집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친구네 집엔 강아지 두 마리가 있었다. 하얗고 작은 강아지(아마도 말티즈였겠지?)였는데, 내가 친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자 강아지들은 크게 짖었다. 그래 봐야 그 작은 애들이 뭐 얼마나 크게 짖었겠냐만은, 그때만 해도 나는 강아지를 퍽 무서워했기에, 두 마리가 날 향해 짖는 게 반가움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공격성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친구는 내가 무서워하니까 주춤거리자 나와 강아지들의 공간을 분리해줬다.

친구의 배려가 고마웠지만,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집의 객이고, 쟤네는 따지자면 이 공간의 주인된 입장인데, 저 두 마리는 이 상황이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그래서 조금 망설인 끝에 강아지들이 내게 다가와서 냄새를 맡도록 하고 가만히 있어 봤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지만 그때 나는 엄청나게 긴장한 상태였고, 당시로선 정말 큰 용기를 낸 선택이었다.) 한참을 냄새 맡으며 날 탐색하던 강아지들은, 양반다리한 내 품에 냅다 배를 까고 누웠다. 퍽 눈치도 없는 나였지만 그게 제 배를 긁으란 표시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날 친구네 집에 머무는 동안 나는 강아지들의 극진한 환대 속에 있었고, 이 경험을 계기로 내가 '강아지 무서워'형 인간이 아님을 깨달았다. 정말정말 귀엽고 착하고 천사 같았던 초록이와 우근이는 내게 큰 깨달음을 준 것이다.

그러니까, 꽤 넓은 스펙트럼에서 나는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당연히 못하는 거라 생각했던 건데 막상 해보니 잘하는 것도 있었고, 싫어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아마 이전까지 다양한 경험을 해보지 못한 것이 한몫했을 것이고, 사춘기를 거치며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고 주저하는 경향이 강해져서 그런 것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이런 경험은 반복적으로 있었고, 이제는 사실 내가 나를 제일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무언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하지 말아야 할 온갖 이유가 머릿속을 채워도 한 번쯤은 시도해보려고 노력한다. 이런 시도 중 하나가 바로 식물 키우기였다.

언젠간 집을 옮길 테니 짐을 늘리지 않는 것이 좋고, 이삿짐 싸는 날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식물을 키우는 건 그렇게 좋지 않은 선택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사 온 후에 제일 먼저 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집에 화분을 들인 거다. 그때 날 부추긴 건 내가 식물을 잘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라 키우는 족족 죽인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다이소에서 바질과 토마토 키트를 사 와서 심은 건, 반쯤은 내가 '돌보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는 오기였다.

그래서 내가 정말 식물을 죽였는가 하면, 그렇게 단편적으로 말하긴 좀 억울한 면이 있다. 몇 해 전, 그러니까 코로나 전에 허브를 키우는 걸로 내기를 한 적이 있다. 으레 식물이란 게 흙에 씨앗 심고 물 주고 햇볕 쬐주면서 가만 놔두면 크는 것 아닌가? 바로 쑥쑥 크는 그의 로즈마리와 달리 내 라벤더는 며칠을 놔둬도 영 싹이 트질 않았다. 조바심이 나서 그걸 베란다에 내놨고, 기쁘게도 싹이 움텄다. 그리고 이튿날, 공교롭게도 내가 물을 주려고 창을 연 순간 사건은 벌어졌다. 아침부터 새가 짹짹거리는 소리가 나더라니, 참새가 싹을 쪼아먹고 가버린 것이다. 내가 어렵게 틔운 싹은 도시에 사는 어느 참새의 아침밥, 아니 아침 입가심으로 전락해버렸다. 난 줄기만 남은 화분을 방에 들이면서 생각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참새가 먹고 떠난 아침밥상을 보는 내 심정은 복잡했다. 그가 곧 내 새싹에 대해 물어올 것이고, 내 대답을 듣고서 꽤 오랫동안 날 놀려댈 게 뻔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일어난 시트콤 같은 일을 듣고 혼자 킥킥대다가 잊을 만하면 얘기하면서 얼마나 내 신경줄을 긁어댈지... 거기에 아무 대꾸도 못하는 나를 상상하면 분통이 터졌다. 그가 키우는 로즈마리는 정말 완벽히 로즈마리의 형태로 잘 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새로 키우게 된 바질과 토마토가 싹이 났을 때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비 오는 날이면 빗물을 받아 물도 주고, 영양제도 사 오고, 지렁이가 섞여 있어 영양이 좋다는 흙도 사 오고. 주워듣고 이것저것 좋다는 건 다 해본 것 같다. 애초에 씨앗 고를 때 바질과 토마토를 선택한 건 '키워서 먹을 수 있으니까'라는 실용적인 이유에서였지만, 마트에서 500g짜리 토마토 한 팩 사는 것보다 돈을 더 쓰고 나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쯤 되니 '이 상태로 나무처럼 크게 키워야지' 같은 생각만 가득했다.

그때 즈음엔 식물을 키우는 데 자신감이 생겼다. 사실 그냥 물만 주고 내버려 두면 쑥쑥 자라는 최하위 난이도의 식물이었지만 그런 건 가볍게 무시했다. 더는 뭘 찾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토마토에 꽃이 폈을 때부터 솎아줄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대로 열매까지 맺혔다. 충분히 크지 못한 토마토에 맺힌 열매는 작디작았다. 평생을 도시에만 살아 고작 이랑 고랑이나 구분할 줄 아는 나로선 농사꾼들이 열매를 크게 키우려고 '적과' 같은 걸 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알았다고 해도 즉시 꽃이며 열매를 잘라내는 걸 해내진 못했을 것이다. 첫 수확이 코앞이란 생각에 들떠 있었고, 잘라내기엔 아쉬웠으니까. 그래서 뒤늦게 알고 난 뒤에도 그냥 내버려 두면 그래도 다 잘 커서 익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잘라낼 부분을 선택하길 미뤘으니까 말이다. 마음을 준 건 뭐든 쉽게 쳐내지 못하고, 미루고 또 미루다 결국 떠나도 미련이 남는다. 그게 내 단점이자 장점인데, 이런 결과로 이어진 것도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나는 식물 킬러라는 오명에서는 벗어났지만, 종종 선택의 기로에서 작동하곤 하는 내 주저함과, 선택하는 순간을 미루고 싶어서 발동하는 회피성 안일함이 좋지 못한 결과로 이어진 것만 같아서 아쉬움이 남았다.

결국 세 개의 방울토마토는 익지도, 크지도 못한 채 철을 지나버렸고, 나는 여전히 어떤 선택 앞에선 무기 밀수업자라도 된 듯 심각해진다. 식물이 나를 키운 건지, 내가 식물을 키운 건지도 잘 모르겠고, 오늘의 내가 어제보다 나은 사람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여전히 내 마음 구석구석을 내가 다 아는 것도 아니지만, 기왕 또다시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면, 다음엔 조금은 더 맛있는 실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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