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없다. 경험만 남을 뿐.
전주에 도착하여 숙소에 가보니 다른 종목 선수들도 있었다. 며칠 전에 올라와서 현지 적응을 끝마친 듯해 보였다. 특히 단거리 선수들의 분위기가 남달랐는데, 대구는 단거리 종목이 강한 도시였다. 남초, 여초 구분 없이 개인종목부터 단체종목인 계주까지 메달을 못 따느냐가 아닌 1등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싸움이었다. 그래서인지 긴장된 모습보다는 서로 장난도 치며 자신 있는 모습이었다. 그중 함께 선발되어 온 같은 학교 수언이도 메달 후보였다.
방을 배정받고 짐을 풀었다. 곧장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을 향했다. 긴장된 상태여서인지 전주종합운동장은 매일 달리던 대구 시민운동장보다 훨씬 커 보였다. 분명 규격은 같은데 말이다. 운동장에는 각 시도에서 온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나와 동혁이 형도 운동장 한편에 돗자리를 펴고 체조를 시작했다. 체조를 하면서 운동장을 보는데 체형과 몸을 푸는 것만 봐도 누가 800m에 출전하는 선수인지 알 수 있었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보였으며 운동을 많이 했는지 가벼움 속에 단단함이 있었다. 대구시 대회와는 전혀 다른 압도감이 느껴졌다.
민호 코치님께 훈련 내용을 받고 조깅을 시작했다. 대회 전날이다 보니 가볍게 몸을 푸는 정도였다. 조깅을 하고 있는데 타 시도 선수들이 동혁이 형에게 와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컨디션 확인도 하고 잘 지냈냐는 안부도 물었다. 역시 우승 후보 다웠다. 내심 이런 사람이 내 옆에 있어서 든든했다. 나도 언젠가 대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 선수가 되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가볍게 산책을 하고 식사를 했다. 대회 당일이라 그런지 모두가 말이 없었다. 나 또한 아무리 경험을 쌓는다는 마음으로 왔다 하더라도 대회는 대회라 긴장이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경기복과 스파이크를 챙겨 대회장으로 향했다. 예선전은 조마다 8명씩 2개의 조로 진행되었다. 2등까지는 결승 진출 확정이고 나머지 기록이 우수한 4명의 선수가 결승에 진출한다. 그러니까 16명 중 기록으로 8위만 해도 결승전을 뛸 수 있었다. 나는 결승에 가서 꼴등을 해도 좋으니 예선을 결승처럼 꼭 예선전을 통과하고자 했다. 먼저 동혁이 형이 속해 있는 1조의 경기가 진행되었다. 다들 각 시도에서 선발되어 온 선수들이기에 체격도 좋고 기운이 달랐다. 장내 아나운서의 안내 방송이 나오며 출발 신호가 울렸다. 예선전이다 보니 전력으로 뛰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보며 자리싸움을 하고 있었다. 200m 지점이 되었을 때 누군가 앞으로 치고 나왔다. 동혁이 형이었다. 다른 선수들을 가볍게 떨어뜨리고 예선 조 1위로 들어왔다. 골인 직후에도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역시 우승 후보다. 다음은 내 차례다.
1조 경기가 끝나고 곧장 2조 경기가 진행됐다. 심판 선수들이 선수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 이름이 불리며 출발선에 섰다. 같은 조 선수들을 보니 키가 전부 컸다. 가뜩이나 왜소한 나는 그날따라 더 작게 느껴졌다. 하지만 대구시 선발전에서 6학년 형들을 다 이기고 여기까지 온 선수 아닌가. 자신감을 가지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출발 신호와 동시에 전력으로 달렸다. 분명 빠르게 달려 나갔는데 맨 뒤에 있었다. 자리를 선점한다거나 경기 운영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따라가기에 벅찼다. 대구시 대회에서 달리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 바퀴도 채 되지 않아 그룹과 멀어졌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무기력감에 경기를 뛰는 것조차 부끄럽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꼴등으로 들어왔다. 화가 난다거나 아쉬움도 없었다 내 실력이 이 정도였다.
허탈함에 힘없이 경기장 밖을 걸어 나오니 감독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예상과는 달리 큰 말씀 없이 수고했다고 하셨다. 선생님도 아직 5학년이고 내년을 생각하고 계신 듯했다. 안도감이 들었으나 여전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것이라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까지 많이 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기분이 안 좋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비록 나의 경기는 끝났지만 함께 훈련하며 고생해 온 동혁이 형의 결승 경기가 남아 있었다. 옆에서 열심히 지원하기로 했다. 결승전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는데 동혁이 형이 말했다.
“1등 할 수 있을까?”
매번 1등만 해오던 형도 이번 소년체전만큼은 긴장이 되는 듯 보였다. 초등학생으로서 마지막 출전이자 한 해 열리는 대회 중 가장 큰 대회다. 긴장이 안 되는 것이 이상했다. 그 질문에 나는 물론이지!라고 답했다. 시간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흘러 결승 시간이 다가왔다.
결승전답게 선수들을 포함한 각 시도 관계자들도 경기장에 나와 있었다. 그중에는 영입을 위해 중학교 지도자들도 있었다. 결승에 출전한 선수들 대다수가 6학년이기에 이번 대회를 끝으로 초등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그만둘지 중학교로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엘리트 선수 생활을 시작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런 선수들을 데려가는 것은 중학교 지도자의 능력에 달려있었다. 좋은 선수를 데려가는 것이 그 학교의 미래가 달려있기 때문에 선수가 골인하는 즉시 말을 거는 지도자도 있었다. 종목이 800m이다 보니 중·장거리 명문이라 불리는 학교 지도자들이 많았다.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선수들은 출발 자세를 취했다.
총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지며 선수들이 힘차게 출발한다. 예선전과는 달리 속도가 빠르다. 한 선수가 같은 팀원의 입상을 위해 페이스메이커를 하고 있다. 단 한 명의 선수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간다. 이것이 전국대회의 수준이었다. 첫 바퀴가 돌아가고 종소리가 울린다. 속도는 떨어지지 않고 더욱 빨라진다. 300m가 남았을 때쯤 누군가 앞으로 치고 나간다. 충남 소속의 선수였다. 이름도 독특하고 동혁이 형만큼 우승 후보로 거론되던 선수였다. 자세가 아주 이상적이었다. 다른 선수들도 놓치지 않고 맹추격을 한다. 이제 남은 거리는 200m. 승부를 가릴 때가 왔다. 선두에 있는 4명을 제외하고 서서히 거리가 나기 시작했다. 누가 더 정신력을 쓰느냐의 싸움이었다. 남은 거리 120m 지점에서 누군가 코너를 빠져나오며 팔을 크게 휘젓기 시작했다. 2위와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고, 관중석에서 환호를 지르기 시작했다. 일등 선수 유니폼에는 대구라고 적혀있다. 전국 소년체전 남자 초등부 800m 1위는 김동혁이었다.
모든 선수가 골인하고 전광판에 기록이 나왔다. 1위 기록은 2분 13초로 개인 최고기록이었다. 나의 최고기록인 29초와 무려 16초나 빠른 기록이었다. 이는 거리로 측정했을 경우 100m 정도가 차이 나는 것이다. 엄청난 기록과 함께 금메달을 획득했다. 경기가 끝나고 곧바로 시상을 진행했다. 많은 분들이 축하의 말과 박수를 보냈다. 내심 대단하면서도 부러웠다.
다른 종목의 선수들도 입상 소식이 들려왔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다 같이 버스를 타고 대구로 돌아가는 길. 선수들의 손에는 메달이 쥐어져 있었다.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 5학년이고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았다고 한들 아쉬운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년에는 꼭 내가 주인공이 되리라 다짐하며 길고 길었던 전국 소년체전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