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육상선수 생활의 시작
길고 길었던 소년체전이 끝나고 일주일은 휴식을 취했다.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몸 관리하느라 먹지 못했던 야식도 먹었다. 큰 대회도 끝났겠다 좀 더 놀고 싶었지만 7월에 열리는 하늘생명컵 꿈나무 육상대회를 준비해야 했다. 이 대회는 학년별로 달리는 전국대회로 다른 대회보다는 입상하기에 수월했다. 그렇다고 규모가 작지는 않다. 초등학생 대회 중에서 규모가 큰 편이다.
꿈같은 휴가 기간이 끝나고 수안이와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수안이는 소년체전에서 4위를 했다. 아쉬움이 많은지 독기를 품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번 대회를 통해 단점을 보완해야만 했다. 나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지구력은 좋은 편이나 스피드가 약한 편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피드 훈련을 할 때는 수안이와 같이 진행하기도 했다. 후배이기는 하지만 단거리만큼은 나보다 빨랐다. 대회가 7월이다 보니 훈련을 오랜 기간 하지는 못했다.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었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정도로 대회장에 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 대회는 대전에서 열렸으며, 우상인 동혁이 형도 출전했다.
7월의 대전은 매우 더웠다. 안 그래도 더위에 약한 편이라 힘을 전혀 쓰지 못했다. 이런 몸 상태로 대회를 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며 열을 식혔고 물도 자주 마셨다. 평소라면 대회 입장 전 준비운동을 1시간 정도 했을 텐데 40분으로 줄여 간단하게 진행했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다 풀렸다. 이렇게 정신없이 예선전을 치렀는데, 의외로 가볍게 결승에 진출했다. 내가 느끼는 것보다 몸 상태는 좋은 듯했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결승전은 오후라 날씨가 조금 풀리길 바라면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밥이 얼마나 잘 들어가던지 두 공기나 먹었다. 결승이 오후 늦게 있기도 하고 안 그래도 힘이 없는데 먹는 거라도 잘 챙겨 먹어야 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른 채 말이다.
결승전은 예선전보다 날씨가 조금 선선해졌다. 날씨가 풀리면서 컨디션도 좋아지는 듯했다. 예선 통과기록을 보니 운이 좋다면 입상도 해볼 만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최고기록만 세우자는 마음가짐으로 대회를 임했다. 내가 속한 5학년 부 앞에 6학년 부 경기가 진행되었는데, 소년체전에서 입상한 선수들이 대거 출전했다. 동혁이 형부터 2위를 차지한 충남 소속의 문순영, 경북의 이용구 등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는 명단이었다. 그래도 당연히 일등은 동혁이 형이 차지할 거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반전이 벌어졌다. 마지막 100m를 앞두고 엄청난 스피드로 치고 나오는 선수가 있었는데, 소년체전에서 4위를 한 경북의 이용구였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스피드였다. 전광판을 본 현장에 있는 모두가 충격을 먹었다. 대회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이 기록은 20년 만에 수립한 기록으로 소년체전의 설욕을 위해 독기를 품고 운동한 것 같았다. 동혁이 형은 3위를 기록했다. 영원한 일등은 없었다. 그 광경을 눈앞에서 본 나는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멍하니 서 있다가 심판이 호명하는 소리에 출발선으로 향했다.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가던 중 단 한 가지가 떠올랐다. 나라도 해야 한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긴장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기운이 내게 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출발선에 섰을 때 고요함이 느껴졌다. 온 정신이 이 경기에만 집중되었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출발만 생각했다. 이내 총소리가 울려 퍼졌고, 앞만 보고 달려 나갔다. 아주 좋은 자리를 선점했으며, 한 바퀴를 돌고 종소리가 울리는데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흥분을 하거나 방심하지 않았다. 그저 먹잇감을 본 하이에나처럼 고요하게 달리고 있었다. 마지막 200m를 남기고 기회가 왔다. 순간적으로 그룹과 격차를 벌리며 치고 나갔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선수들은 대회를 뛰다 보면 본인이 입상할 거라는 직감이 온다. 그 직감이 왔다. 무조건 입상이다라고 생각하며 앞만 보고 달렸다. 하지만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120m를 남겨놓고 순위에 변동이 생겼다. 분명히 추월을 당했다.
지나가는 선수가 누구인지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키가 컸으며 고글을 쓰고 있었다. 출발 전부터 초등학생 선수가 고글을 쓰고 있길래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역시 실력 있는 선수였다. 옆을 지나가는데 따라붙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다. 골인 후 전광판에 뜬 내 기록을 보니 2분 24초로 최고기록을 세웠다. 1등은 2분 21초였다. 그 짧은 거리에서 3초나 차이가 났다. 수안이와 스피드 훈련을 열심히 했으나 아직도 부족했다. 아쉬움이 남고 비록 1등을 못 했지만 전국대회에서 처음으로 입상을 했다. 은메달이다.
막상 입상을 하고 나니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을까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자리에 앉아 스파이크를 갈아 신고 있으니 심판 선생님들이 다가와 시상식을 하러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옷과 짐을 챙겨 입상자들이 모였다. 1등을 차지한 친구는 경기도 소속으로 이름이 혁준이었고. 3등은 제주도 소속의 상현이었다. 셋 다 처음 보기도 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아무 말 없이 시상대로 갔다. 같이 걸어가는데 혁준이는 생각보다 키가 더 컸다. 내가 저렇게 키가 컸다면 스피드가 좋아질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상현이는 제주도 소년답게 까만 피부에 다부진 모습이었다. 시상대에 도착하니 선생님과 부모님이 계셨다. 세분 모두 해맑게 웃으시면서 수고했다고 하셨다. 특히 부모님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기뻐하셨다.
시상대에 올라서니 앞에는 많은 관중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입상을 한 것이 실감이 났다. 기분이 묘하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계속해서 번졌다. 3위부터 순서대로 시상을 진행했고 은메달이 내 목에 걸렸다. 육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의 노력들이 빛을 발하는 듯했다. 시상이 끝나고 다 같이 기념사진을 찍은 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혁준이와 상현이는 앞으로도 계속 운동장에서 맞붙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음에는 내가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서겠노라 다짐하며 대회가 끝났다. 선생님께서는 소년체전부터 이번 대회까지 쉼 없이 달려왔고 당분간은 대회도 없으니 쉬엄쉬엄 하자고 하셨다. 모처럼 가족여행도 가고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번 대회 입상이 부모님께서도 생각을 달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체력증진을 위해 육상부 활동을 해보라고 하셨지만 전국 대회에서 입상하는 모습을 보며 앞으로 지원을 해줄 테니 진로를 육상 선수로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하셨다. 사실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단 한 번도 육상선수라고 해서 학업을 게을리한 적이 없다. 부모님이 앞으로 지원을 해주신다고 하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훈련이나 대회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첫 대회인 서구 육상대회를 나갈 때 만해도 긴장을 하던 내가 이제는 전국에서 경쟁을 하는 선수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자신감도 많이 생겼고, 목표도 전국을 바라보게 되었다. 학교에서나 운동장에서나 모든 분들이 축하의 메시지와 응원을 해주셨고 알아봐 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찬란했던 나의 여름이 끝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