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그리고 기다림

침묵으로 시작된 첫 독서모임

by 글쑴


갑작스럽게 정해진 그날의 외출은 긴장과 설렘의 연속이었다. 햇살은 유난히 따사로웠고 하늘은 푸르렀다. 봄이 전해주는 생동감 덕분인지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나의 첫 독서 모임이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강사님과 책상에 오밀조밀 모여 앉은 우리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강사님의 안경 너머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 꽂혔다.


“자~ 자기소개를 시작해 볼까요?”


강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머릿속은 생각들로 바빠졌다.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 나를 소개할 문장들로 차근차근 정리해 나갔다.


“안녕하세요. 김 00입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자 준비했던 문장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머릿속은 하얀 도화지로 변해버렸다. 고작 이름 석 자를 내뱉는 데에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자리에 앉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두 손으로 꾹 눌러 진정시켜야 했다.


아쉬움이 남았다. 전하고 싶은 진심은 많았지만 정작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의 나는 먼저 다가가지도, 먼저 말을 걸지도 못했다. 누군가 인사를 건네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마치 암기라도 한 듯 막힘이 없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와 환한 표정들 사이에서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혹시 ‘내 힘없는 목소리로 나를 평가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한없이 작아졌다. 토론 시간에도 생각들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다시 삼켜졌다.


강사의 설명과 질문이 반복될수록 나의 시선은 자꾸만 바닥을 향했다. 그럴수록 마음에는 커다란 파도가 일렁거렸다. 그 파도 앞에서 문득 깨달았다. 삶과 앎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삶은 말할 수 있었지만, 지식은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이런 목마름은 불혹의 나이가 지났음에도 나를 호기심 많은 문학소녀로 되돌려 놓았다. 책을 펼쳐 놓으니 하하 호호 학창 시절의 왁작거림이 들리는 듯했다. 하얀 칠판 위에 써 내려간 문장들이 춤을 춘다. 나도 따라 춘다. 하나 둘 내게로 와 나의 것이 된다.


눈앞에 펼쳐진 활자들 사이로 별을 노래한 윤동주가, 자기만의 색채로 세계를 그려낸 백석이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감정을 노래해 온 수많은 시인의 얼굴이 스쳤다. 문장마다 삶의 흔적을 남긴 소설가들의 이야기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신기루처럼 사라진 나의 문장들, 꾹꾹 눌러 놓은 떨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자리,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조차 기꺼이 품어주는 문장들이 주는 온기는 나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10년 전, 나의 삶에 ‘독서‘라는 취미가 조용히 들어왔다. 그날 나는 많은 말을 삼켰다. 그리고 오래 머물렀다. 그 침묵 속에서 다음을 기다렸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