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을 이해하게 되는 것
“여보세요.”
”내다. “
”응, 밥 먹었어? “
나는 오십이 넘었는데도 엄마에게 반말을 한다. 불효녀라고 해도 반박하기 쉽지 않다.
”내 요즘 우울하다. 만사가 다 귀찮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친정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건다. 텔레비전이나 세탁기, 보일러 등 전자 제품들이 말을 안 들을 때면 늘 나를 찾는다. 머리가 아프다거나 얼굴이 붓는다며 전문적 조언이 필요한 순간에도 내게 전화한다.
솔직히 이렇게 매번 물어보는 엄마 덕분에 난 A/S 기사가 되기도 하고 선무당이 되기도 한다.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결국 문제점을 해결하고 마는 나를 보고 맥가이버가 친구 하자고 올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언니와 남동생이 있음에도 항상 나에게만 전화를 한다.
“너거 언니는 잘 모른다. 니는 물어보면 다 안다 아이가. 그라고 니가 말도 잘하고 편하다.”
예전에는 엄마의 이런 말들이 참 불편했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는 스트레스였다. 말로만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상황 속에서 의사소통이 꼬일 때면 매일이 긴장 상태였다. 가족이라는 편안함이 때로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상처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의 ‘나이 듦’이 느껴지는 순간부터는 짜증이 아닌 이해가 먼저 앞섰다.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의 뿌듯함이 더 크게 남는다.
이번 사건은 엄마의 존재 가치에 상처가 난 이야기다.
절에서 기도를 마치고 식당으로 간 친정엄마에게, 같이 다니는 할머니가 큰 소리를 냈다고 한다.
”가시나야, 니는 어데 갔더노? 와 이제사 오노! “
사람들이 줄을 서서 밥을 담고 있는데, 그 앞에서 ‘가시나’라는 호칭으로 무안을 줬다는 얘기였다. 한두 살 먹은 애들도 아니고 80살이 넘은 노인들끼리 할 이야기가 아니지 않냐며 엄마는 하소연했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 “왜 그렇게 말하느냐, 마음이 좋지 않다”라고 말하지 못한 것이 못내 화가 난 듯했다. 그 화가 우울함으로 번져 나에게 전화를 한 거였다.
나는 열심히 엄마의 인생 상담을 했다.
“엄마, 다음에 그 할머니 만나면 다른 말은 하지 말고, 그날 기분이 참 안 좋았다고 해. 나한테는 그런 단어를 쓰지 말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해.”
“기분이 상했으면 상했다고 표현을 해야 해.”
엄마와 나는 많이 닮았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 특히 상처를 받았거나 기분이 나쁠 때에는 더더구나 그랬다.
요즘 나는 이 틀을 깨려고 노력 중이다. 감정을 표현하니 삶이 한결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엄마의 전화를 받고 응원을 하고 싶었다. 사실 엄마에게 했던 그 말들은, 나 스스로에게도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었을지 모른다.
섬세한 감정을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대가 그들보다 먼저
그들의 감정을 해치지 못하도록
서둘러 그대의 감정을 해친다.
- 칼릴 지브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