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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토파일럿 Jan 15. 2023

당신의 집은 편안하신가요?

중3딸을 위해 다녀온 초저렴 여행지, 오사카 (feat. 아빠의 역할)

나의 자녀교육 방침은 방임에 가깝다. 

공부는 하고 싶을 때 하는 것. 

공부하기 늦은 나이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공부의 필요성을 스스로 느낄 때 까지 내버려 둔다. 

그래서인지 두 딸의 학교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다. 

집사람과 이 문제로 대립하기도 하지만 ‘우리 집’은 항상 편안함을 주는 곳이어야 하기에 애들에게 별다른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시골 할아버지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신 부모님은 내가 태어나고 나서 장사를 하기위해 도시로 분가하셨고 나는 여섯 살 때 까지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길러졌다. 

아버지가 차남이라 종손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기른 정 때문인지 30여명 가까이 되는 사촌 중에서도 할아버지의 나에 대한 편애는 지나칠 정도였다. 


오냐오냐 모든 것을 받아주시던 조부모님의 품을 떠나 일곱 살 때부터 시작된 부모님과의 도시생활. 나는 천방지축이었고, 아버지는 너무 혈기왕성 했을 시절이었을까? 


그 시절 누군가 일곱 살 나에게 물어보았다. 


"00이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한 사람이 없다는 걸 눈치 챈 그 사람이 아빠는? 이라고 물었을 때 

내 대답은 “제일 미운 사람인데……. ” 였다. 


그 정도로 난 매일 혼만나는 말썽쟁이 였고, 

어느날 인가 아버지가 화를내며 던질 듯이 하늘 높이 치켜들었던 것은 날카로운 빛을 내는 다리미 였다.

물론 던지진 않으셨지만 4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 


군 입대 전까지 내게 집은 ‘지뢰’같은 곳이었다. 

물론 아무 일도 없던 날이 더 많았다. 

하지만 가끔씩 성격 급한 아버지의 고성과 조목조목 반박하는 어머니의 대꾸가 맞붙는 날이면 며칠이나 아무도 살지 않는 곳 마냥 적막이 흘렀고, 드물게는 뇌관을 건드린 지뢰처럼 아버지의 폭력이 터지기도 했다.

 

나 역시 천성으로는 아버지의 급한 성격을 타고났고, 후천적으로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그마한 변화에도 쉽게 반응하는 눈치빠르고 소심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부동산을 알려주신 스승님이 내가 눈썰미 좋다는 소리를 하실 때가 있는데 이런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특기중 하나는 네잎크로바 찾기. 

지금의 아내와 사귄지 100일째 되던 날 주었던 선물은 네잎크로바로 만든 책갈피 100개가 꼽힌 연습장이었다. 

지금도 가끔씩 산책길에 흐드러진 토끼풀 속에서 굳이 발길을 멈추지 않아도 하나씩 찾아내곤 한다.    


  

이것 역시 오사카성 산책 때 찾은 해외최초 네잎토끼풀 기념 샷이다.


보고배운 잘못된 선입견 탓인지 아내와 결혼 후 5년간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싸웠다. 

육아는 당연히 애 엄마가 홀로 감당해야 하는 의무였고, 난 가장의 권위만 내세웠다. 

둘째가 돌잡이 할 무렵 육아에 지친 와이프 대신에 주말에는 애들과 놀아줄 법도 하건만 난 거의 골프장에서 수준급의 골프실력을 뽐내기 바빴고 동반자와의 저녁 술자리로 2, 3차 까지 퍼마시고는 다음날까지 숙취로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많은 싸움과 타협을 통해 밖으로 나도는 빈도는 줄었지만, 그새 아이들은 손탈 시기를 지나 훌쩍 커버렸다.


내 만족과 조직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살았던 삶이 가족을 바라보는 삶으로 변하게 된 것은 평생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신 부모님의 생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도와드려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농지연금을 위해 뛰어든 경매 판에서 돈공부를 시작했다. 


읽은 책이 백 권을 넘어설 때쯤 독서에 대한 스펙트럼이 자연스럽게 확대되면서 인문서적도 읽게 되었고 그로인해 내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내 이기심과 마주하게 되었다.


부모의 역할은 키워주고 먹여주는 것을 넘어 가정에서 안정감과 평안함을 제공해야 아이들이 자존감 있는 인생을 설계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인 내가 먼저 제대로 서야 한다는 것. 

단순하고 어려운 게 아니어서, 그래서 가족들에게 더 미안했다...    

  



매일 핸드폰만 붙잡고 있는 막내에게 하고싶은게 있는지 물었을 때 몇 년 전 다녀온 적이 있는 오사카를 나와 단둘이 다시 가고 싶다고 하기에 흔쾌히 그러자고했다. 


대신 계획은 오사카 여행 경험이 있는 막내가 짜는 것으로. 


비행기를 몰고 오사카를 수십 번은 다녀왔지만 비행으로 일본에 체류할 일은 없었다. 일명 레이오버라고 하는 현지체류는 편도로 목적지에서 머물러야 가능한데, 일본과 중국은 왕복해도 근무기준인 8시간 이내라서 보통 당일로 찍고 오는 스케줄이 대부분이다. 주로 밤에 출발하는 동남아 노선비행이 왕복 8시간을 초과하기 때문에 편도착륙 후 24시간 정도 목적지에 체류하다가 돌아오는 편이다. 


편도 8시간이 넘는 장거리 노선의 경우 휴식시간 보장을 위해 근무하는 조종사가 늘어난다. 12시간 까지는 3명, 16시간 까지는 4명이 번갈아 가며 조종석을 지키고, 최근엔 러-우 전쟁으로 항로를 우회함에 따라 늘어난 비행시간 때문에 한편에 5명이 투입되는 애매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막내가 짜온 스케줄이 아주 심플하다. 

오사카 중심 저렴한 비즈니스호텔에 숙박하고 다이소, 돈키호테, 편의점 그 외 간식과 아기자기 한 것들 구경 및 쇼핑.

읽을 책 몇 권, 옷가지 말고 짐이 없는데 가방은 꼭 제일 큰 걸로 각자 가져가야 한단다. 


사고 싶은게 많다고...


직원 찬스로 항공권 왕복 12만원/인당, 호텔비 3만원/박당, 공항에서 시내까지 교통비, 그 외 쇼핑 및 식비 포함해서 대략 60만 원 정도 경비가 소요됐다.


이틀째 늦잠 자는 딸을 뒤로하고 오사카성 산책을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중심가 근처의 다이소와 편의점은 다 들린 듯. 

한국 다이소보다 몇 배는 더 큰 규모에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물건들이 상점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막내는 어디에는 뭐가 있고 어디에는 없는지 가격까지 비교해가며 원하는 아이템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발품으로 얻은 자신만의 데이터를 가지고 귀국전날 밤 본인 쇼핑리스트 대로 폭풍쇼핑을 했다. 

어설픈 일본어로 손짓발짓 섞어가며 원하는 물품을 찾아서 구입하는 막내의 집요함을 보며 “요 녀석 나중에 아파트 임장도 이렇게 하면 잘 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여행에선 녀석이 담고 싶은 세상의 크기가 조금 더 커져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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