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점 4점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여자와 남자들은 특징에 따라 같은 이름을 쓴다. 아우렐리아노는 사색적인 남자, 아르까디오는 불같고 육체적인 남자, 아마란따는 금욕적인 여자, 레메디오스는 미녀로 설정된다. 서로 다른 인물이지만 동일한 이름 속에서 캐릭터는 개성을 잃고 선조의 삶을 그대로 답습한다. 책 후기에서 많은 독자들이 인물들이 헷갈린다고 했는데, 그것은 작가의 의도였던 것 같다. 시대는 변했지만 동일한 실수와 삶을 반복하면서 실제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간이 직선이 아니라 원형으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이러한 장치 때문일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우르술라다. 우르술라는 마지막에 기억을 잃고 정신이 오락가락하지만, 그럼에도 가문을 유지하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다가 죽는 버팀목 같은 존재다. 그녀는 친척과 결혼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대의 딸인 아마란따 우르술라는 조카와 근친상간을 하여 돼지 꼬리를 가진 아이를 낳고, 그로써 부엔디아 가문은 끝이 난다. 아마란따 우르술라는 이름과 같은 삶을 살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특성이 가문을 종결시키는 속성이 된다. 부엔디아 가문의 시작과 끝은 근친상간이라는 사건으로 수미상관을 이룬다.
이 소설에서 근친상간은 반복되는 금기이자 재앙의 예고다. 근친상간을 하면 돼지 꼬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는 경고를 우르술라는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한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근친혼의 경우 유전병 발병 확률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완전히 비현실적인 설정은 아니다. 그러나 금지된 것은 결국 실행된다. 결국 그 금기를 어김으로써 가문은 멸망한다.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나 노아의 방주가 떠오른다. 마꼰도 마을에 며칠 동안 그치지 않는 장마는 정화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마을은 정화되지 않는다. 결국 우르술라와 남편이 일궈온 마꼰도는 부엔디아 가문과 함께 몰락한다.
소설 초반의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인생을 전쟁에 바친다. 그는 자유당을 지지하며 반란을 일으켜 보수당에 맞선다. 그러나 모든 혁명이 그렇듯, 처음에는 정의로운 사명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목적은 변질되고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조차 모호해진다. 니체의 말처럼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결국 그는 보수당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되고, 전쟁을 통해 살인자이자 괴물이 된다. 내가 허무하다고 느끼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추상적인 ‘국가’라는 개념을 위해 현실의 삶과 수많은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신념이나 사상을 위해 삶을 바치는 일은 숭고해 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사상도 ‘나’라는 존재가 있을 때만 성립하는 것이며, 그것이 삶보다 우선될 수는 없다고 느낀다.
전쟁의 허무함을 깨달은 아우렐리아노는 황금 물고기를 만든다. 녹였다가 다시 만들기를 반복한다. 아마란따 역시 수의를 만들었다가 다시 풀기를 반복한다. 이는 페넬로페의 베틀이나 시시포스의 형벌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반복은 죽음을 기다리는 행위이자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처럼 보인다. 인생 또한 비슷하다. 대부분의 날들은 반복되며, 그 안에서 약간의 차이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삶은 형벌일 수도 있고 축복일 수도 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은 대개 그것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멜키아데스와 삘라르 떼르네라도 인상적이다. 멜키아데스는 관찰자이자 예언자로서 가문의 멸망을 기록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해석하지 못한다. 마지막 아우렐리아노가 가문의 종말과 동시에 그 예언을 해석하게 된다.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모든 사건은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삘라르는 적극적으로 운명에 개입하며 인물들을 부추긴다. 그러나 결국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마치 시간은 이미 완성된 책처럼 존재하고 우리는 그 일부를 넘겨보고 있는 것 같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뿐이다.
페르난다는 체면을 중시하는 인물로, 폐쇄적인 태도로 가문을 고립시킨다. 그러나 그녀 역시 입체적인 인물이다. 메메의 연인을 총으로 쏘아 불구로 만들고, 메메를 유배 보내며, 손주를 방치한다. 동시에 다른 자식들에게는 열성적으로 편지를 보낸다. 그녀의 사랑은 선택적이다. 인간이기에 사랑은 결코 공평할 수 없다. 페르난다는 손주를 익사시키려 하고, 그 대가처럼 자신의 아들도 욕조에서 익사한다. 인과응보의 구조다.
이 소설에는 성녀와 창녀의 모티브가 반복되는데 마꼰도의 남자들은 매춘을 하면서도 사랑의 대상은 따로 둔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고독하게 살아간다. 레메디오스는 성녀적 존재로, 많은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 되지만 결국 침대보와 함께 승천한다. 그녀는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존재다. 이 작품에서 사랑은 대개 육체적 끌림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의문이 든다. 오히려 우르술라가 보여주는 헌신적 사랑이 더 높은 단계의 사랑처럼 느껴진다.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고, 역사 또한 반복된다. 기록과 기억은 반복을 막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나 인간은 또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마치 부엔디아 가문처럼. 작가는 이를 운명으로 본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