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점 3.5점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비극적인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적인 비극이 되기도 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인생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예기치 못한 상실을 직면한다. 물론 이 작품은 역사적인 배경을 품고 있지만, 나는 이 책은 무엇보다 사랑과 상실에 대한 책이라 생각한다.
주인공 레오 거스키는 뉴욕에 사는 이민자 열쇠공으로, 홀로코스트 때 가족을 잃고 인생의 사랑인 앨마를 잃게 되며, 나중에는 삶의 원동력이던 멀리서나마 응원하고 지켜보던 아들 아이작도 잃게 된다. 레오 거스키의 친구인 브루노 역시 아내와 사별하고, 강아지가 집을 나가서 잃어버린다. 소설 속 또 다른 어린 앨마와 그녀의 가족 또한 아빠이자 남편을 병으로 잃는다. 이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이별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사랑의 또 다른 동의어는 슬픔이고, 사랑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동반한다. 왜냐면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의 아픔이 크기에 슬픔이 크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유한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사랑이란 관계 속에서 누군가는 홀로 남겨지게 된다. 레오 거스키는 유년 시절, 친척의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집착한다. 하지만 앨마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면서 사랑은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 있던 레오 거스키를 삶으로 다시 끌고 온다. 또한 앨마를 잃고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레오 거스키를 살게 한 것은 아들 아이작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는 레오 거스키가 사진을 찍었을 때, 상실이 커서 아무런 형태도 찍히지 않았으나 아이작에 대한 사랑으로 그 빈자리가 채워지면서 사진을 찍었을 때 자신의 모습이 점차 사진 속에 드러나는 것으로 표현된다. 레오 거스키는 앨마와 아이작을 누구보다 깊이 사랑하면서 이 사랑에 상처받을 것도 알지만 그래도 사랑한다. 윤동주의 [서시] 중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받지 않는다. 사랑하는 것들은 언젠가는 떠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용기를 갖고 사랑한다. 역설적으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린 앨마가 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사랑의 역사] 속 앨마와 번역을 부탁한 의문의 남자를 찾아다니고, 앨마의 남동생이 누나를 위해 레오 거스키를 찾으려 하는 등의 노력에서 상실의 아픔은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에 레오 거스키와 어린 앨마가 만나게 되면서 이별의 슬픔과 아픔이 연대 속에서 극복 가능함을 암시한다.
소설 속에서는 사랑이 거창한 고백이 아닌 일상적 행동으로 표현된다. 앨마의 엄마가 다진 간 샌드위치를 싫어하지만 자신의 엄마에게 말하지 않는 것, 레오 거스키가 아이작을 멀리서 묵묵히 응원하며 지켜보는 것, 앨마의 삼촌이 화가가 되고 싶다는 앨마를 미술학교에 등록시켜 주는 것 등 사랑은 일상에서 매 순간 녹아있다. 아이작 앞에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은 레오 거스키가 선택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아이작의 사진을 모으는 것, 앨마의 선택을 존중하고 가끔 안부 편지를 보내는 것, 아이작의 모든 소설을 다 읽어보는 것 등 레오 거스키는 말하지 않아도 사랑을 표현한다. 마치 우리네 부모님들이 자식들의 상장을 모아놓고 어린 시절 사진들을 거실에 전시하듯, 아이작은 레오 거스키의 말할 수 없는 가장 큰 자랑거리였으니까. 인생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행복한 날, 가장 큰 슬픔을 준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속 김첨지처럼, 레오 거스키는 인생은 아름답다고 느끼던 어느 날, 스타벅스에서 아이작의 부고를 신문으로 접하게 된다. 어린 앨마의 엄마는 번역가이지만 남편의 죽음 이후, 삶의 의욕을 잃지만 앨마는 엄마와 자신을 위해 아빠의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한다. 엄마의 데이트 주선, 엄마에게 번역을 부탁한 남자에게 엄마의 편지를 가로채고 대신 보내기 등 이 모든 노력의 일환은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비롯된 행동들이다. 앨마는 이 번역을 부탁한 남자를 추적하게 되면서 남자가 번역을 부탁한 책의 진짜 작가인 레오 거스키를 만나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슬펐던 구절은 레오 거스키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나는 오래전에 기다림을 포기했다.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갔다, 우리에게 가능했던 인생과 우리의 지금 인생 사이에 놓여 있던 문은 우리 눈앞에서 닫혀버린 후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눈앞에서. 내 삶의 문법은 이렇다. 경험 법칙에 따라, 복수형이 나오면 항상 단수형으로 고친다. 그 고귀한 우리라는 말이 무심코 흘러나오더라도 신속히 머리에 일격을 가해 비참함에서 벗어난다.’라는 부분이었다. 죽음이던 이별이던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고 나면 어느 순간 ‘우리’는 ‘나’로 바뀐다. 두 명은 한 명이 되고 남은 사람은 ‘나’만 있는 삶에 익숙해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희한하게도 원래 모든 사람들은 혼자로 태어나고 혼자로 살지만 사랑하는 많은 것들이 생기면서 ‘우리’가 된다. 혼자였던 감각이 뭐였는지 까맣게 잊게 되고 ‘우리’에 익숙해진다.
그래도 소설 속 많은 상실을 겪은 인물들이 타 소설 속 인물들처럼 삶을 포기하거나 자신의 인생을 진창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서로 극복하고자 하는 점이 아주 맘에 들었다. ‘내‘가 되어도 언제든 우리는 ’ 우리‘가 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