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화 미술관 방문기
저장해둔 미술관으로 가기로 했다. “김택화 미술관”이었다. 함덕 해변 근처에 있어서 내가 지내던 성산보다는 다소 위쪽에 있어 마지막 날 이곳을 들렀다 공항쪽으로 움직이면 되겠다 싶었다. 어느정도 계획이 다 있었던 것 같다.
다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이번에도 한 삼십분을 더 위로 올라가야 했다. 기사님은 말씀이 없으셨는데 왜인지 나는 또 불편함을 느꼈다. 백미러(?)로는 기사님의 이마만 보여서 표정을 읽을 수도 없었다. 뭐, 기분이 안 좋으실 수도 있고, 꼭 나를 친절하게 대하셔야할 필요도 없다. 나도 항상 사람들에게 친절하지는 못하고, 내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더 그러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급정거가 많고, 과속방지턱을 지나갈 때도 속도를 줄이지 않으신 건지 충격이 많이 왔다. 가는 내내 뭔가가 자꾸 불편해 노트를 다시 꺼내 이것저것 끄적였다.
택시에서 내려 미술관에 도착했다. 숨이 살짝 잘 쉬어지지 않았고, 손이 자꾸만 떨렸다. 일단 미술관에 들어갔다.
미술관 건물이 참 예뻤다. 들어가자마자 작은 프론트 데스크가 있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두번 외자, 뒷편에서 나무문을 열고 직원분이 나오셨다. 그분께 티켓을 구매하고, 혹시 가방을 맡겨도 되는지 여쭤봤다. 체크아웃을한 상태라 가방이 꽤 무거웠다. 직원 분은 흔쾌히 옆에 올려두라고, cctv가 바로 위에 있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사실 비싼 건 없어서 잃어버려도 큰 일은 안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갑, 핸드폰 중요한 건 다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원분이 참 친절하셔서 기분이 좋았다. 화가와 전시에 대해 짧지만,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설명을 듣고 또 나무로 된 문을 열고 전시실로 들어갔다. 전시실에는 나 하나 뿐이었다.
전시실은 크지 않았고, 작품마다 설명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사실 설명이 크게 필요하지도 않았다. 모드 제주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지금의 제주와는 비슷하면서도, 또 참 많이 달랐다. 지금의 제주에는 초가집이 잘 없는 것 같은데, 그림에는 초가집들이 많이 나왔다.
그림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는 그림을 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멋지다. 잘 그렸다.’ 라는 생각과 제주에 대한 작가님의 애정이 느껴졌다.
김택화 화가는 제주에서 1940년에 태어나고, 자라다 제주 출신으로는 최초로 홍대 미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여러 상을 휩쓸고, 인정을 받았지만 경제적인 상황때문에 졸업 직전에 졸업을 포기하고 제주로 돌아오셨다. 제주로 돌아올 때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렸다.
2006년 암으로 생을 마감하셨다고 한다. 60대 중반이셨을테니, 길지는 않은 삶이었던 것 같다.
전시실에 들어오자마자 왼쪽 벽에 보이는 다소 간단해 보이는 스케치들이 있었다. 들어올 때는 그림이 간단해 보여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관심을 크게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나가기 전에, 뭔가 여운이 남아 놓친 건 없나 전시실 앞쪽으로 다시 나가 그 벽을 보았는데, 한 동안 그 벽을 떠날 수 없었다.
그 벽에는 김택화 화가가 암으로 생을 마감하기 이틀 전에 병실에서 작업한 6점의 스케치가 걸려있었다. 강력한 진통제를 맞아 의식이 부분적으로 소멸된 상태에서 작업한 그림들이라고 한다.
죽음을 앞둔 순간, 육체적인 고통에 몸 부림치며 화가가 표현하고, 남기고자 했던 것들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며 그림과 설명을 찬찬히 보았다. 가족, 그리고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무언가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던 게 아닐까 추측을 해보았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꽤 젊은 나이인데도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저 6점의 그림들을 보며, 느끼는 게 많았다. 하루하루 감사히 살면 참 좋겠지만, 지금은 그것까진 안될 것 같고. 그래도 가족, 그리고 다른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전시실을 나서고, 굿즈샵도 한참 구경하며, 샘솟는 소비욕울 꾹꾹 눌렀다. 떠나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는데 미술관 곳곳이 참 정갈하고, 고즈넉하고,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