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숭생숭
“나는 2년전부터 나중에 너랑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친구들한테도 다 말하고 다녔어.”
“너 나랑 결혼하면 무조건 진짜 행복할걸.”
“나 놓치면 후회할텐데, 너 나랑 결혼해야해”
다른 남자를 그리워 하는 나를 붙잡고, 좋아한다고 이런 말들을 쏟아내던 사람이,
며칠 전 다른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밀며 청혼을 했다.
꽤 오래 전, 대학교에 입학하고, 짧게 짝사랑을 한번한 후 한 유학생 오빠와 썸을 탔다. 몇개월 썸을 타고, 그 오빠는 졸업을 위해 다시 한국을 떠났다. 졸업도 한참 남아서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도 없었다.
반년 이상 매일 연락하고 지냈다. 적어도 나는 정말 애절하게 그 오빠를 그리워 했다. 그때만해도 연애 경험이 없었던 나는, 태어나서 처음 ‘노트북’, ‘이터널선샤인‘ 같은 영화들을 찾아보며 혼자 엉엉 울기도 했다. 아, 특히 ‘비포 선라이즈‘에 아주 많이 이입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지역에서 온 젊은 남녀가 짧은 시간을 함께하며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다시 헤어진다. 짧은 시간 동안의 기억을 가슴에 품고, 오랜 시간 서로를 그리워 하며 세월이 흘러 버린다. 나는 이게 딱 나, 우리의 이야기 같았다. 그때는 참 그 상황이 너무나 영화같고, 로맨틱해 보였고, 운명적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오빠를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다 점점 그 오빠로부터의 연락이 뜸해지고, 그 과정에서 상처도 많이 받은 나는 포기가 잘 안돼 괴로워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새 사람을 만나면서도 그 오빠가 그리워서 남자친구에게 미안했다. 이주 정도. 그 이후에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고, 남자친구가 너무 너무 좋았다. 참 신기했다.
1년쯤 더 지나, 그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다. 딱 그때, 해외에 있던 오빠에게 연락이 왔다. 곧 한국에 온다고. 그렇게 연락을 시작했고, 전에도 말이 참 잘 통했던 우리는 밤새워 카톡을 하기도 하고, 몇주간 매일 연락을 다시 이어갔다. 당시 나는 막 헤어진 전 남자친구를 잊지 못해 매일 울고, 밥도 못 먹어서 살도 쭉쭉 빠진 상태였다. 어쩌다 보니, 카톡으로 친구처럼 이런 얘기도 하고, 오빠에게 위로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오빠를 만났다. 거의 2년만에, 내가 그토록 좋아하고 그리워 했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 그런데 이상했다. 설렘보다는 실망이 컸다. 내 기억 속의 오빠는 키도 크고, 어깨도 넓어서 듬직하고, 잘생겼었는데 다시 본 오빠는 키도 크고, 어깨도 넓지만 딱 그뿐이었다. 더이상 멋있거나, 매력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막 헤어진 전 남자친구만 그리울 뿐이었다.
그리고 원망만이 남았던 것 같다. 남자친구와 만나기 전, 먼저 연락을 뜸하게 하고, 마음이 식은 것 같은 모습을 보인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오빠였다. 그 과정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힘들었기에 원망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다시 돌아 온 오빠는, 자기는 친구들에게 한국에 자기가 나중에 꼭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고 내 얘기를 해왔다고 한다. 나를 많이 그리워 했고,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날 거라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그 말도 믿을 수 없었다.
어찌됐든, 헤어짐에 괴롭고, 외로웠던 나는 그 오빠와 한달 정도 참 잘 놀러 다녔다. 그리고 연인이 되었다. 사실 나는 계속 전 남자친구를 잊지 못하고 있었고, 그 오빠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보다 삼십센치는 큰 다 큰 남자가 내게 안겨서 소리내며 운 적도 몇 번있다. 그럼에도 만나보자고 해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그 오빠는 남은 학기들을 마치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당시 악덕 상사 밑에서 눈물 쏟고, 코피 쏟고, 온갖 핍박은 다 받으며 인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전남친만 그리웠고, 전화로 건내주는 오빠의 위로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다. 오빠는 또 소리 내어 울었다.
아마도 참 좋은 사람인 것 같기는 하다. 감정 표현도 잘하고, 섬세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시차때문에 힘들텐데도, 내가 퇴근할 때까지 안 자고 기다렸다가 전화를 했다. 그렇게 기다렸다 전화를 했는데, 내가 너무나 무심하게 전화를 받고, 짧게 끊어 울었던 적도 몇번 있다고 했다.
하지만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 전에 오빠가 나에게 준 상처를 생각하면 정말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잔인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헤어질 때 이런 내 생각을 오빠에게 직접 얘기했던 것 같다. 억울해 했다. 자기는 항상 나를 좋아했다고. 잘 모르겠고, 솔직히 말하면 통쾌한 기분도 조금은 들었던 것 같다.
그 후, 우리는 서로 인스타 팔로우를 끊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는 내 스토리를 보거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지는 않았다. 아마 숨겨두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나도 그 오빠 스토리와 계시물을 숨겨 두기 설정해 두었다. 그러다 가끔 궁금할 때면 들어가서 보곤 했다.
나와 헤어지고, 그렇게 오래 지나지는 않은 후에, 그 오빠에게 새 여자친구가 생겼다. 얼굴이 묘하게 나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가끔씩 오랜만에 그 오빠의 계정에 들어가도 여전히 그 여자친구와 찍은 사진들이 그대로 있길래, 곧 결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제 밤, 결혼하는 친구의 사진을 보다가 문득 이 오빠도 곧 결한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인스타에 들어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친구가 오빠에게 프로포즈를 받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을 인스타에 올렸고, 오빠 계정에 그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반지를 들고 무릎을 꿇고 있는 익숙한 뒷 모습을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저 프로포즈를 받는 사람이 나일 수도 있었을까. 오빠가 했던 말대로, 오빠랑 결혼을 하게됐다면 행복했을까. 오빠는 지금은 나를 다 잊었을까. 나를 썅년으로 생각하지는 않을까.
쓸 데 없는 별 생각들을 다 했다.
하지만, 오빠가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란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고, 한때 내가 참 소중한 사람이었고, 아름다운 기억들을 많이 남겨 주었다. 다만, 나도 좀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다. 나도 이왕이면 좀 마음 맞고, 매력적인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