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하고 나서 한번 도 보여달라고?
“혹시 내일 저녁에 집 보러 가도 되나요? 새 세입자 분이 계약하고 나서 집을 한번 더 보고 싶대요“
어제 오후에 부동산에서 받은 문자다.
얼마 전 드디어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새 세입자를 찾게 되었다. 가계약이 끝났고, 오늘이 계약날이라고 했다. 더 집을 안 보여줘도 되어서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뜸 집을 또 보고 싶다고 한다.
집을 보여 주기 시작한지는 일년이 넘었다. 갑자기 집주인이 집을 팔려고 하면서부터였다. 그래서 작년 이맘때부터 틈틈이 부동산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집을 보여줘 왔다.
썩 유쾌하지 않은 것은, 부동산에서 연락이 올 때 대뜸 ”오늘 저녁에 되세요?“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평소에 청소을 잘하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라서 이런 질문은 너무나 당황스럽다.
집을 보여 주려면 집도 치워야 하고, 다른 일정과도 조율을 해야하고, 집을 보여주는 과정도 괜히 긴장되고 불편하다. 집을 보여주는 날이면 어김없이 꼭 늦게들 오던데, 기다리면서부터 아무것도 못하고, 이상하게 숙제 검사 받듯이 긴장이 된다. 집에 들어와 집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대여섯번 정도 집을 보여 줬지만, 부동산 시장 현황 탓인지 매매는 성사되지 않았고, 결국 내가 나갈 때가 되어 집주인은 새 전세 세입자를 찾기 시작했다.
한달 정도 매주 주말마다 집을 보여준 것 같다. 하루에도 여러 부동산에서, 한 부동산에서도 여러명한테 연락을 받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방문을 왔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또 하루 전날 방문을 한다고 하니 짜증이 났다. 가뜩이나 야근을 계속하느라 열시 넘어서 집에 들어가는데, 집을 치울 시간도 없다. 일단 사정을 얘기하고 주말에만 가능하다고 답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봐도 영 언짢아서, 혹시 계약을 하고서 집을 다시 보러 오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가구 배치때문에 집 구조를 보러 온 다는 거였다.
의아했다. 전에 나도 그 부동산에서 방의 구조와 규격이 센치미터로 표시된 도면을 받은 적이 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그래서 그때 받은 도면과, 가구를 넣기 전 비어 있는 집의 이곳저곳의 사진도 사진첩에서 찾아 보냈다. 인터넷만 뒤져도 이 집 구조와 평면도, 시설들에 대해 상세하게 나온 자료들이 많았다.
혹시 이런 자료들이 없는 건가 싶어서 사진들과 자료 링크를 부동산에 보내며, 이걸로는 부족하냐고 물었다.
부동산에서는 세입자가 아무래도 “자세히” 직접 보고 싶어한다고 했다.
자세히? 저 단어에 순간 꽂혔다. 자세한 건 센치미터로 표기된 도면이 도 자세하고, 내 짐이 있는,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오면 짐 때문에라도 자세히 보기 어렵거니와, 옷장이나 냉장고나 수납장들을 다 열어 보며 자세히 보려는 거면 더 싫다.
나도 전세로 새 집에 이사를 가지만, 이해가 안된다. 나는 심지어 도면도 못 받았다. 아니, 요청해서 받긴 했는데 구조만 나와 있고 센치미터 단위로 규격이 표기된 자료는 없다. 맘 같아서는 줄자를 들고 이사 갈 집에 찾아가 직접 길이라도 재서 적어 오고 싶다. 하지만 지금 세입자에게 너무나 번거롭고, 불편한 일일 것 같아 감히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시도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짜증이 난다.
집이 나가고도 다른 부동산에서 집 보여 달라고 연락이 와서, 집 나갔다는 얘기도 내가 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얘기를 내가 부동산에 하는 게 맞나 싶다.
뭐 누가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니고, 다 각자 먹고 살기 위해 자기 일을 하는 거고, 세입자도 이사 오기 전에 좀 더 꼼꼼히 뭔가를 해보고자 하는 거라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지금은 좀 화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