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세우는 삶

핫팩 화상자국

by 제인


찬바람이 매섭게 두 뺨을 후려친다. 비 온 다음 날이라 춥다더니, 일기예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히트텍에 조끼에 두터운 점퍼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도 바람 앞에서는 다 소용없다.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한겨울 비상 무기, 핫팩을 꺼냈다. 마구 흔들어 깨우고, 바지 주머니에 하나씩 밀어 넣고, 욕심이 생겨 두 개를 더 뜯어 조끼 안에 양쪽으로 쑤셔 넣었다. 그제야 몸이 조금 사람처럼 돌아왔다.


밤새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핫팩은 여전히 열일 중이었다. 덕분에 매서운 추위도 그리 무섭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주머니에서 꺼내보니 아직도 따끈하다. 이걸 버리기엔 왠지 억울했다. 한 대여섯 시간은 더 쓸 수 있겠는데?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또 합리적인 인간이 되었다.


샤워를 마치고도 차마 버리지 못한 핫팩을 잠옷 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었다. 전기장판을 켜고, 얼었던 몸을 녹이겠다고 배 위에 하나를 올려놓고는 새벽녘 깊은 잠에 빠졌다.


아이의 기척 소리에 늦은 아침, 피곤한 몸을 겨우 일으켰다. 화장실 가는 아이를 챙기는데 뭔가 쎄한 느낌이 돈다. 내 몸을 슬쩍 내려다보는 순간,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배꼽 위, 붉은 반점 하나.


엄마야, 이게 뭐지?


500원짜리 동전만 한, 탱글탱글한 붉은 물집이 아주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뿔싸. 이게 그 핫팩 화상이구나. 이런 미련퉁이 같으니라고.


속에서 징징이가 난리를 치는 와중에 아이에게 외쳤다.


“쭌아. 엄마 어떡해! 배에 물집 잡혔어!”


한가득 걱정 어린 얼굴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핫팩 화상 자국.’


흐르는 찬물로 식혀주라는데,

부위가 내 배다.

이 추운 날 배에 찬물을 어떻게 끼얹으란 말인가.


물집은 절대 터뜨리면 안 된다고

유튜브들이 단호하게 말한다.


AI에게 사진까지 찍어 물어봤다.

반드시 화상 연고를 쓰고,

병원에 꼭 가보라고 한다.


하…


그때부터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욱신욱신.

아까는 멀쩡했는데.


바지 단추 잠그는 부분이

하필 그 물집 위에 겹친다.

큰일이다.


샤워는?

물집 터지면?

터져서 흉 지면?

병원은… 가야 하나?


집에는 큰 대일밴드도 없다.

반창고도 없다.

이럴 때만 꼭 뭐가 하나도 없다.


아침밥을 챙겨주고 곰곰이 앉아 생각해 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의사에게 내 배를 보여줄 자신이 없다.

핑계를 대자면 이 동네엔 피부과가 없다.

(사실은 있다.)


아이를 수영장에 데려다주고

나는 이마트 안에 있는 약국으로 향했다.


긴장한 채로 머릿속에서 대사를 몇 번이나 연습했다.

어떻게 말하지.

덜 쪽팔리게 말하는 방법은 없나.


약사가 묻는다.

“뭐가 필요하세요?”


나는 숨을 한번 고르고 말한다.

“저… 핫팩 안고 자다가 배에 화상을 입었는데요.”


쑥스러워진 얼굴을 애써 숨기는데

약사는 어쩌다가 그랬냐는 표정으로 웃으며

“조심하시지 그랬어요.” 하고 한 마디를 얹는다.

그건 판단이었는지, 위로였는지 모르겠다.


의사에게 가보는 걸 추천한다기에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배라서… 좀 싫어요.”


약사가 한 번 더 웃는다.

아, 너무 창피하다.


다행히 여자 약사님이라

그나마 말은 할 수 있었다.


화상 연고, 세균 감염 막는 연고,

거즈와 반창고까지 챙겨 들고

나는 괜히 더 당당한 척 계산을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가를 돌보듯 물집을 대했다.

터질 새라 연고를 살살 바르고,

거즈를 넉넉하게 덮어 반창고로 단단히 붙였다.

제발 빨리 나아라.


통증은 여전히 있었고,

아이 손이 스칠까 봐 며칠을 조심조심 노심초사했다.


그렇게 무사히 일주일이 지났다.

붉던 물집은 노란빛으로 변했고

통증도 거의 사라졌다.


또다시 AI에게 사진을 찍어 물어보니

나아지는 과정이라며

굳이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한다.

그 말에 나는 또 안심했다.


그러던 순간도 잠시.


아이가 갑자기 달려와

내 위에 철퍼덕 앉는다.

엄마에게 응석 부리고 싶었나 보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펑’ 하고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옷을 들춰보니

와…


거즈를 뚫고

진물이 티셔츠까지 번져 있었다.


멍해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펑 터져버리니 속이 더 시원한 마음도 같이 든다.


아, 약사가 건네준 세균 감염 예방 연고.

이때부터는 이걸 발라주라고 했지.


옷을 갈아입고 상처 부위에 정성스럽게 새로운 연고를 바르고 거즈를 또 얹었다.

참 성실하다.


춥다고 전기장판을 틀어놓은 이불속에

그 뜨거운 핫팩까지 넣어놨으니

그 안에서 열 폭발이 얼마나 됐을까.


피곤한 나머지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잠만 푹 자버린

미련퉁이처럼 크게 폭망한 짓을 해버린 나를 원망해야지

누굴 원망하노.


한 달이 지나니 붉은 새살이 올라오고

진물도 통증도 사라졌다.


대신 자국은 남았다.


이 정도 자국 하나, 대수롭지 않다.

꼴보기 싫으면 문신이나 하면 된다.


너무 열심히 살다 저지른 실수 하나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