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남북 접경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이틀 전부터 조용한 일상을 누린다는 기사를 접했다.
작년 6월, 북의 대남 쓰레기 풍선 살포를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6여 년 만에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다.
북한 역시 이에 질 새라 대남 방송으로 대응하여, 접경 지역 주민들은 한동안 소음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남쪽에서 먼저 확성기 방송을 멈췄고, 그에 답이라도 하듯 북에서도 대남 방송을 멈춰, 잠시 평화로운 듯하지만 이 평화가 얼마나 갈지 사실 알 수는 없다. 그저 매일을 살아내는 우리야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내지만,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지 않은 휴전 국가다.
휴전, 전쟁과 같은 단어들은 자연스레 이스라엘과 하마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얼마 전에 본 다큐멘터리도 생각났다. 다큐멘터리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우크라이나의 요충지인 마리우폴에서 AP 통신 취재팀이 담은 20일간의 영상이었다.
평범한 일상을 빼앗기고 순간마다 죽음을 맞닥뜨린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두려움과 고통이 기록되었다. 누구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긴박한 상황, 비인도적인 환경, ‘저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라고 울부짖던 8살 어린이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며 조해진 작가의 『빛과 멜로디』가 떠올랐다.
작가는 특유의 담담한 문체로 다양한 인물들,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96p 인터뷰 첫날부터 승준은 나스차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하게 됐다. 평평한 화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만으로 보 적 없는 장면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입체화되어 역동하는 것만 같았고, 나스차의 응축된 불안과 분노가 그대로 전해지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에도 승준의 일상은 그 이야기의 자장 안에 있었는데, 특히 지유를 돌볼 때 그랬다. 공습 사이렌이 울리는 한밤의 도시, 아파트 지하의 음습한 식량 창고, 남은 밀가루와 설탕, 아파트 복도를 위태롭게 걸어 다니는 한 여자, 그 모든 이미지가 승준의 머릿속으로 불쑥불쑥 입장하곤 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크게 달라졌다. 감정을 이입할 대상과 사건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단순히 타인의 일이라고 간주했던 예전과는 달리, 나와 내 가족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상상에, 타인의 고통과 불행이 좀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111p 그날 콜린은 드레스덴이 처음 화제에 올랐을 때의 또렷하고 형형했던 정반대의 모습, 극도의 혼돈과 고통 속에서 거의 절규하듯 조각난 말들을 토해냈다. 그녀의 눈에 그런 콜린은 또 다른 의미의 부상병으로 보였다. 무려 팔십 년 가까이 치료를 받을 기회마저 없었던 부상이었다.
183p 탑승 때 보니 동료 중 한 명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저런 상태로 이륙이나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동료는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짧은 시간 동안 귀밑 머리칼이 하얗게 변해 있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보다 믿기지 않는 건 따로 있었다. 뭉게구름 위에서 전투기를 모는 게 뜻밖에도 황홀했다는 것.
186p 나는, 나도… 사람을 죽이려고 태어나지는 않았지. 말하면서 처참한 마음으로 깨달았다. 아들에게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는 것을.
전쟁은 적군에게도 아군에게도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전투기를 몰아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다며 평생 아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콜린도 결국 부상병이었다. 승리도 승리가 아닌 전쟁으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128p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나는 믿어요. 보다시피 나도 이제 늙었어요. 더 늙기 전에 그가 했던 방식으로 그의 역사를, 내 아버지의 삶을 기념해주고 싶어요.
141p 그래, 기적이 맞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돕기로 했으니까.
우리는 일단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의 프셰미실이라는 도시로 갈 거고, 거기에서 다시 영국으로 이동할 거야. 나와 리디아, 그리고 여름의 한가운데서 태어날 너를 받아 주기로 한 사람은 놀랍게도 난민 출신이야.
149p 승준은 달랐다. 가령 민영이 남긴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다 먹을 때, 길에서 어린 학생이나 할머니가 나눠주는 전단지를 두 손으로 받을 때, 그럴 때…
어려운 환경의 권은에게 손을 내밀었던 승준, 아이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 우크라이나에 사는 나스차와의 인터뷰를 반대했지만 결국 전쟁터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선물을 보내주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변화한 민영, 시리아 난민인 살마에게 도움을 주는 권은과 살마를 영국으로 초대하는 애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권은의 오래된 카메라를 수리해 주시는 노인까지. 사람을 살게 하는 건 이런 작은 호의와 따뜻한 빛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가가 조용하게 풀어나가는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한줄한줄 읽어가며, 날 것 그대로인 다큐멘터리를 보며 흘린 눈물만큼의 눈물을 흘렸다.
등장인물들의 다정함과 온기가 작가의 묵직한 메시지와 함께 책을 덮어도 뇌리에 남는다.
조해진 작가의 이야기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주제, 만나보지 못한 세상의 사람들을 향한다.
이어질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이어져 서로를 구원하는 서사가 오래 기억날 것 같다.
PS 모두를 위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오길 진심으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