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골밖에 소유하지 못하지만, 영원히 내 것인.
눈을 감고 추억을 건져 올려 본다. 누가 누가 있었더라...
한 사람씩 떠올리다가 또다시 첫사랑 J를 생각했다. 그런데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이들도 있는 걸 보니, 자신이 이제 중년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벌써 이십 년도 넘은 일이니까…. 어제 일처럼 기억할 순 없잖아.
이런저런 잡념에 빠지다 보니, 은밀한 과거 이야기가 자신도 모르게 눈앞에서 상영되어 버렸다.
1998년 크리스마스. 날씨는 매섭게 추웠지만, 신촌 거리는 젊은이들의 열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사람들로 빽빽한 거리에 자동차가 비집고 들어와 경적을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그 소음에도 사람들은 흥에 취해 웃음을 터뜨리며,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이 밤하늘을 가르며 크게 울려 퍼졌고, 그 노래는 마치 이 들뜬 거리를 응원하는 듯했다. 그 복잡한 길에서 소년은 소녀의 꽁꽁 언 손을 잡았다. 소녀는 차가운 손길에 놀라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미묘한 악력과 그의 마음이 느껴져 그냥 두었다.
둘은 이미 이 신촌 거리를 몇 바퀴째 돌고 있었다. 갈 곳을 정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저, 발걸음은 목적지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서로에게 결정을 미루는 듯한 시간이 흐르고, 결국 소년이 먼저 용기를 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고… 너무 춥잖아. 이 밤에 더는 머물 곳이 없으니까.”
그 말은 어쩌면 오늘이라 허락된 유일한 설득이자 핑계였다.
‘남자가 먼저 용기를 내야지.' 하면서도, '뭐야, 느끼하게 모텔이라니...’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에 소녀는 괜히 웃음이 났다. 소년의 등 뒤에 숨어 계단을 올라갔다. 방은 후끈했고, 티브이와 침대가 있었다. 마치 신혼집 안방에 들어선 듯한 어리석은 착각이 스쳤다.
문 앞에서 그가 지어 보인 미소는 괜히 어색하고 못나 보였다. 그는 먼저 씻자며 말을 꺼냈다. 소녀는 화장실로 들어가며, ‘대체 뭘 씻어야 하지?’ 잠시 고민했다. 샤워기를 틀었다. 대충 몸을 적시고 나왔다. 속옷은 낡았고, 바디로션은 생략되었다.
중년의 그녀는 그 장면이 못내 안타깝다.
"아이고, 저런."
소녀는 큰 타월을 두를까, 다시 옷을 입을까 잠시 망설이다가, 음전해 보이도록 옷을 다시 입었다.
'이 순간이 정말 현실일까?'
가슴은 쿵쿵 뛰고, 정신은 어질어질했다. 소녀는 이제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용감한 탐험가. 그게 이제 자신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소년 앞에선 이 설렘과 떨림을 감추고 싶었다. 잠시 뒤 소년도 샤워실의 뜨거운 김을 뒤로하고 나왔다. 매끈한 등과 정리된 복근이 소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몸매가 얄밉도록 아름다웠다. 사랑의 첫 장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 뒤로 4년 동안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 때론 다투고, 때론 서로에게 실망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왠지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나쁜 결말로 흐를까 봐 두려워 마음속 말을 아낀 것이었다. 그 침묵은 오히려 소년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소년은 떠났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
함께일 때 둘은 종종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미래는 변하기 마련인데, 소년은 언제나 냉정한 결론을 내리곤 했다. 예를 들면 가정을 이루고, 집을 사고, 어쩌고 저쩌고, 흔한 현실적인 계산 말이다. 소녀는 자신도 대학을 졸업하면, 회사를 다닐 것이다. 그리고 무거운 짐은 반씩 나누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말로 다져질 미래보다, 지금 소년이 자신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말을 아끼던 내가 답답했던 걸까? 중년이 된 그녀는 아직도 이별의 이유가 마뜩잖다.
소녀의 눈물은 뒤돌아서는 아름다운 소년의 발길을 잡았다. 둘은 그들만의 공간에서 마지막을 보냈다
'너는 나 없이도 곧 괜찮아지겠지.
다정하고 멋진 너니까.
너의 매력은 어디서나 드러나겠지.'
소녀는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소년의 품에 안겨, 약속을 종용했다.
"너의 쇄골은... 영원히 내 것이야."
소년은 담담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추억이 여기까지 이르자. 중년의 그녀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유치하긴!'
시간이 얼마나 흘렀건,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스쳐간 수많은 대화와 장면 중에서, 오직 쇄골만이 남았다.
그 쇄골 이야기는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한 대사에서 나온 얘기다. 남자 주인공인 알마시는 유부녀 캐서린을 온전히 가질 수 없는 현실에 아파하며, 그녀의 몸 일부인 쇄골이라도 독점하고자 그곳에 이름을 붙인다. ‘알마시의 협곡’ 그 시절 소녀도 소년에게 그런 마음이었다.
그를 다시 만나 물어보면 이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이제는 그의 소식조차 모르지만, 문득 SNS를 뒤져 그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소년 없는 스물세 번째 해를 보내고 있다. 중년이 된 그녀는 아직도 꿈에서 그 소년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백 번도 넘게 반복한다. 그리고 과거보다 더 격정적으로 슬퍼하다 눈을 뜬다.
소녀의 꿈에서 늘 나이를 먹지 않는 그 소년은,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아마 가정을 꾸리고 식솔들과 알콩달콩 살겠지?
그리고,
기세가 등등해 보이던,
그의 엄마와 누나는 여전하시려나?
아!
문득 시댁이 될 뻔한 그들을 떠올리자,
로맨스 영화는 그만 막장 드라마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녀는 '과거 회상'영상을 꺼버렸다.
다시 할 일 가득한 현실로 돌아오자,
중년의 소녀는.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옛날 이야기라 재밌었다....'